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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해야 그가 삽니다 (창세기 20:1-18)
주일예배
베이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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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실패와 넘치는 은혜(창 20장) – 유평교회
본문 : 창세기 20장 설교자 : 이병권. 오늘 본문인 20장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의 별명과 전혀 어울리는 않는 아브라함의 실패를 볼 수 …
Source: achurch.or.kr
Date Published: 11/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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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0장 –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 새벽기도 설교
본문 1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없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 남방 그랄 땅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리고 이주 직후 아브라함은 …
Source: dtynch.kr
Date Published: 3/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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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9(화) “창세기 20:1-18” / 작성: 김순식
본문 창세기 20장 1-18절 찬송가 15장 ‘하나님의 크신 사랑’ 아브라함이 남쪽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할때 그랄왕 아비멜렉에게 …
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10/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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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망치는 편견 < 창세기 20장 1절부터 18절>
창세기 20장 2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습니다.
Source: yeolinchurch.com
Date Published: 5/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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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0장 강해, 두 번째 겪는 씨의 위기의 의미
노승수의 강해설교/창세기강해. 창세기 20장 강해, 두 번째 겪는 씨의 위기의 의미.
Source: lewisnoh.tistory.com
Date Published: 2/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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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실수를 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창 20:1-18) – 하나님의 …
설교 동영상: https://youtu.be/eSB6iiZCfUM?t=3525. 2020년 6월 7일 주일예배 … (창세기 20장 1~18절). [들어가는 말]. 어떤 실수를 반복해서 …
Source: www.kpccoh.org
Date Published: 8/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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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묵상. 1월 19일. 창세기 20장. – 하늘품은교회
창세기 20장. 하나님께서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1. 본문은 아브라함이 두 번째로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임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위기에 처하게 된 상황을 …
Source: hapoom.or.kr
Date Published: 2/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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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제20장 강해 –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 다음블로그
창세기 제20장 강해 –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본 장에서는 아브라함의 두 번째 실수와 그 실수를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기사의 내용입니다.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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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 창세기 20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 인생여행
와잇사 미솸 아브라함 알차 한네겝 와예쉡 베인 카데쉬 우베인 슈르 와야갈 비게랄 개역개정,1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
Source: tripol.tistory.com
Date Published: 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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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창세기 20 장 설교
- Author: 베이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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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8. 12. 1.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f8ry6YKxHJ0
반복되는 실패와 넘치는 은혜(창 20장)
주제 : 반복되는 실패와 넘치는 은혜
본문 : 창세기 20장
설교자 : 이병권
오늘 본문인 20장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의 별명과 전혀 어울리는 않는 아브라함의 실패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 가십니다. 아브라함의 실패가 있는 곳에 또한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반복되는 실패를 어떻게 다루셨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절에 의하면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이후, 마므레에 거하던 아브라함은 네게브라는 지역을 거쳐서 그랄이라는 곳에 거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아브라함은 예전에 애굽에 내려갔을 때 했던 일을 반복합니다. 어떤 일입니까?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일입니다.
애굽의 일로부터 대략 25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도우심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셨고, 전쟁에서 승리를 허락하시기도 하셨고, 그의 간구에 응답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아브라함은 신앙의 레벨이 올라가지 않았을까요? 믿음의 분량이 자라서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이전과는 다른, 뭔가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실망스럽게도 아브라함은 25년 전과 똑같은 일을 합니다. 그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거짓말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그 거짓말의 결과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서 사라를 데리고 갑니다.
지금 사라의 나이가 90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면 우리가 이해하기 좀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사라가 타고난 동안에다 방부제 미모였는지 아니면 특별한 피부 관리를 받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하심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사라가 정말 예쁘기는 했던 모양입니다.
어쨌든 아브라함은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 거짓말을 하고 자신의 안전을 위해 아내를 파는 비겁한 행동을 다시 반복합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의 나이로, 여러 경험을 하며 연륜을 쌓았지만, 자신에게 어려움이 생기자 똑같은 실수를 다시 반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좀 한심해 보이십니까? 하지만,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나도 별로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 자신도 아브라함과 같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경험하는 실패들, 그 중에 많은 것들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전에 했던 실패를 또 다시 반복하고 되풀이 하는 것이 많습니다. 사실 나를 얽매이게 만들고, 나를 무너뜨리는 죄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습관적인 죄들이 나를 힘들게 하고, 넘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치 사투리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서울말을 너무 자연스럽게 쓰니까 여러분은 제 고향이 경상도라는 사실을 잘 모르고 계시겠지만, 제가 편하게 별 생각 없이 말하면 사투리가 나오기도 합니다. ‘쌀’을 ‘살’로 발음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못 알아듣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나에게 더 익숙하고 편한 게 있습니다. 죄도 그러합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특별히 나에게 더 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에서 조심하지 않으면, 우리는 넘어진 곳에서 또 넘어집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특별히 약한 부분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탐욕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과한 욕심 때문에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고 죄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권위에 반항하는 태도가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과 부딪치고, 학교에서는 선생님과 부딪치고, 직장에서는 상사와 부딪칩니다. 위에 있는 권위에 따르지를 못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다혈질적인 성격 때문에 반복해서 실패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에게 한번 팍하고 터트리고 나서, 자신은 뒤끝이 없다고 말합니다. 뒤끝이 없는 것은 좋은데, 앞 끝이 너무 심각하기 때문에 뒤끝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말이 문제입니다. 남의 말을 함부로 해서 사람들에게 어려움이 되는 겁니다. 반복되는 같은 종류의 잘못들, 알지만 또 다시 실수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돈이, 어떤 사람에게는 성적인 유혹이, 어떤 사람에게는 사람을 의식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약한 부분입니다. 자신에게 특별히 약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같은 죄를 반복하며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럼 아브라함이 이렇게 또 다시 실패했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한 번은 봐 줄 수 있었지만 두 번은 안 된다. 이제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이렇게 하셨을까요?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또 다시 아브라함의 편에서 일을 진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라를 보호하기 위해서 사고를 수습하시는 겁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3)
아비멜렉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사라를 데려왔다가 자신이 죽을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4-5)
아비멜렉의 이 말은 아브라함이 소돔을 중보하면서 하나님께 했던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하나님은 의인을 악인과 함께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셔서 그가 범죄하기 전에 미리 그를 막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돌려보내라고 명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7)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가리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선지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선지자라는 단어가 여기서 처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선지자로서 할 일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전에도 소돔을 위해 기도했었고, 지금 이 시점에서도 선지자로서 기도하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브라함을 통해 일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그냥 하실 수 있지만, 아브라함의 기도를 통해서 일하시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실패했지만,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두려워서 또 다시 불순종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으로 그의 선지자의 자격을 무효화 하거나, 그 역할을 빼앗지 않으셨습니다.
아비멜렉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를 알고 이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8절에서 16절까지는 하나님의 경고를 받은 아비멜렉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보면 아비멜렉이 믿음의 조상 같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 같습니다. 조금 헷갈리기도 합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9-10)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심하게 책망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믿음의 조상이지만, 자신의 잘못 때문에 이방인 아비멜렉에게 책망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자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에게 혼나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왜 이런 일을 했느냐고 묻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브라함에게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우리가 자주 그러는 것처럼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11-13)
아브라함은 이곳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을 죽일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브라함의 잘못된 생각일 뿐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8절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들은 그들은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사라가 아브라함의 이복누이로 아내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아브라함이 사라를 이복누이라고 말한 것은 상대를 속이고 사라가 아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의도한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하는 말들은 핑계일 뿐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대처하는 태도에 있어서, 상황을 탓하고, 사람을 탓하고, 변명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우리는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나의 잘못을 똑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에서 돌이켜 회개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애통함으로 나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회복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어설픈 핑계와 구차한 변명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습니다. 내가 얼마나 잘못했고,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바로 알 때,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변명은 이렇게 끝나고, 아비멜렉의 행동이 이어집니다. 아브라함의 온전치 못한 변명에 비해서 아비멜렉의 행동은 파격적입니다. 아비멜렉은 자기의 잘못을 보상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다 합니다. 그는 사라를 돌려보내고 양과 소와 종들을 취하여 아브라함에게 줍니다. 이번에도 아브라함은 애굽 사건에 이어 또다시 재산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 사건이 신문에 나온다면 어떤 제목으로 나올까요? ‘아내를 팔아서 부자가 된 아브라함’ 별로 기쁘지도 않고, 떳떳하지도 않은, 찝찝한 일입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의 보상은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거주 할 수 있는 땅을 제공하였고, 사라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 위해서 당시의 방법대로 은 천개를 줍니다. 특별히 16절에 보면 아비멜렉이 사라에게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었다고 말합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사라의 남편이라고 하지 않고 그들의 거짓말을 따라서 ‘오라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말은 아브라함과 사라, 두 사람의 마음을 뜨끔하게 했을 것입니다.
잘못은 누구나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잘못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비록 상대의 거짓말 때문에 잘 알지 못하고 실수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대로 필요한 보상을 다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잘못을 말하며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핑계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잘못을 해결했던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보상 이후 아브라함은 선지자로서 하나님께 아비멜렉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셔서 출산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실패와 그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통해 일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람의 실패가 그분의 은혜를 없이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연약함이 그분의 은혜를 가로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죄와 실패보다 더 크고 더 깊고 더 넓습니다. 우리가 하는 어떤 것도 하나님의 은혜의 크기를 넘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러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브라함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약점이나 지금도 반복되는 수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은이 망극합니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죄와 실패보다 더 큽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자녀가 몇 번 잘못했다고 인연을 끊자며 집에서 쫓아내는 부모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러하다면 하물며 하나님은 어떻겠습니까?
혹시 아브라함처럼 실패하셨습니까? 그것도 같은 잘못을 또 저질렀습니까? 이제 좀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또 넘어지셨습니까? 고쳐지지 않는 나쁜 습관 때문에 좌절하고 계십니까? 그렇다 하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죄가 있다면 진심으로 자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당신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새로운 시작을 주실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용서가 죄의 모든 결과를 없이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죄의 결과로 오는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마귀의 거짓말과 송사에 넘어가지 말고, 변함이 없으신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살았다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요? 이 넘치는 은혜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서로에게 은혜를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내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듯이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없는 은혜를 받은 우리가 오히려 은혜에 대해서 인색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가장 쉽게 범하는 죄가 다른 사람을 향한 정죄와 비판입니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 기억 못하는 것처럼, 내가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지 잊어버리고 스스로를 괜찮다 생각하며 별것도 아닌 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내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기억하고, 다른 사람의 실수와 잘못에 대해서 관대하도록 합시다. 나의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가족들에게 은혜를 베풀도록 합시다. 사실 가족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면서도 때로는 가장 힘든 일인지도 모릅니다.
빌리 그래함의 아내인 루스 사모님이 기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혹시 사모님은 남편과 이혼을 생각해보셨습니까?’ 그 질문에 대해서 루스 사모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요. 저는 이혼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살인은 여러 번 생각해봤습니다.’
가장 많이 사랑하며 서로에 대해서 용납해야 할 부부 사이라 하더라도 은혜를 실천하는 것이 쉽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내가 낳은 자녀라 하더라도 은혜로 대하고 사랑으로 품어주기가 쉽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안에서 한 가족이지만 사랑하기 힘들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일은 서로를 향해 판단하며, 정죄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일은 사랑하는 일이고, 서로에게 은혜를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서로를 향해 마음을 넓히고 사랑을 실천하도록 합시다. ’그럴 수도 있지‘ 생각하고 너그럽게 받아들이도록 합시다. 사랑을 담아서 말하고 은혜를 베풀도록 합시다. 서로에 대해서 친절히 대하도록 합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음을 고백하며 은혜를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잘하려고 하지만 또 넘어지고 자주 실패하는 우리를 인내하시고 받아주시며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아침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며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럴 때 우리는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도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서 우리의 죄와 실패보다 훨씬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영적으로 성장하고 승리하는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20장 –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 새벽기도 설교
본문 1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없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 남방 그랄 땅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리고 이주 직후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다가 아비멜렉의 첩으로 빼앗길 뻔한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것은 24년 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없이 자기 마음대로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이주했을 때와 똑 같은 실수를 반복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세상으로 향하여 나아갈 때 실패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음을 교훈해 줍니다.
여러분, 성경 에베소서 2장은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이 세상은 악한 마귀가 권세를 잡고 있어 악의 세력이 범람하고 있는데 성도 스스로는 이들의 공격을 이겨낼 힘이 없다’ 우리의 힘으로는 마귀를 대적하여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승리하는 삶을 살려면 비록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바라보며 그의 약속의 말씀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품안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며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혹시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까?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그를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까? 더욱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위에 굳게 서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지혜요, 가장 좋은 선택입니다.
3-7절을 보면 아브라함의 거짓말로 사라가 아비멜렉의 첩이 되어 정절을 잃을 상황이 되자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개입하여 아비멜렉이 사라를 범하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여러분, 만일 하나님께서 이 사건에 개입하지 않으시고 아비멜렉이 사라를 범하도록 방치해 두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 인류 구속을 이루어가고자 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은 물론 아브라함 또한 믿음의 조상이 되지 못하고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비록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을 받았다 할지라도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도우심과 인도함 없이는 구원을 온전히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히게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언제나 넘어지고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끝내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온전히 이룰 수 있는 것은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도우심과 인도하심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인하여 자신을 자랑하거나 교만해서는 안 되며 항상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8절을 보면 사라를 범하려다 꿈에 하나님으로부터 심판 경고를 받은 아비멜렉은 아침 일찍 일어나 모든 신하를 불러놓고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한 아비멜렉의 겸허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 앞에서 인정하고 고백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등 또 다른 죄를 범하기 일쑤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비멜렉은 하나님을 잘 모르는 이방인이었고 자신의 권위를 생명과 같이 여기는 전제 국가의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신하들을 불러 놓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참된 용기가 무엇인지를 잘 아는 자였습니다.
결국 그의 이러한 용기 있는 행동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잘못을 용서받고 자신의 생명뿐만 아니라 국가의 안위까지 보장받는 은총을 입게 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나 깨달았을 때, 그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이 잘못을 범할 때 그 잘못을 숨기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시면,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을 용서하셨듯이 여러분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회복의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아브라함은 신앙인으로서의 진설된 삶을 살지 못하고 하나님 대신 자신의 생각을 의지하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자기 아내의 정절을 가볍게 여기고 거짓말을 하는 등의 매우 세속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믿음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이었던 아비멜렉으로부터 심한 책망을 받는 수치를 당했습니다.
아비멜렉을 향한 하나님의 지시가 없었다면 아브라함은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보듯이 택함 받은 성도라도 세상에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 사람들과 같이 세속적인 삶을 살게 될 때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하게 됨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게 될 때 버리워져 사람들에게 밟히듯이 성도가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고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삶을 살게 되면 세상의 조롱거리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가 세상에서 조롱받는 것은 그를 불러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구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죄악으로 어두워진 세상에 구원의 빛을 발하는 것은 물론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할 것입니다.
2016/08/09(화) “창세기 20:1-18” / 작성: 김순식
본문 창세기 20장 1-18절
찬송가 15장 ‘하나님의 크신 사랑’
아브라함이 남쪽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할때 그랄왕 아비멜렉에게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속임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사건이 있기 바로 직전에 소돔과 고모라가 죄로 잿더미로 변하는 놀라운 심판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거짓말을 하는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1백세가 되기까지 수차례 나타나서 말씀하시고 예언하시고 권면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개입하셨습니다.(3절)
하나님은 비록 아브라함이 실수했을지라도 직접 개입하셔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필요하다면 꿈에서라도 나타나셔서 위기를 막아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사라 때문에 너는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인을 건드리기만 하면 내가 너를 죽이겠다’고 일종의 협박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토록 택한 백성을 사랑하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사실 아비멜렉은 잘못이 없었습니다. 잘못이 있다면 거짓말을 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비멜렉의 편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편을 들어 주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부분은 시험 들기에 딱 알 맞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의로운 아비멜렉의 편에 서지 않고 불의한 아브라함의 편에 섰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하나님의 편애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놀랄만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공정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택한 백성들에게는 편애라고 느낄 정도로 그들의 편에 서십니다. 그러나 자기 집의 아들이 아무리 못된 짓을 한다고 해서 옆집에 있는 모범생 학생에게 유산을 물려주지 않는 것과 같이 결국 자기 아들의 편에 서는 아버지의 심정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공정하냐 불공정하냐의 문제라기 보다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자녀를 이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하나님께 항의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속여서 이렇게 된 것이지 자신은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 일을 행했다고 말했습니다. 아비멜렉의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이렇게 항의하는 아비멜렉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6절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하나님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너를 막아 내게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저지른 죄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저지른 죄가 아니라 하나님께 저지른 죄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현몽하신 이유를 ‘그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려함’이라고 밝히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라의 몸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먼 훗날 사라의 후손에서 메시아가 태어나기 때문에, 그리고 사라의 몸에서는 약속의 자녀가 태어나기 때문에 그 몸을 더럽히지 않도록 보호해 주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죽을 줄 알지니라“
하나님의 의도는 분명했습니다. 그 여인을 범하지 말고 빨리 돌려 보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비록 아브라함이 실수해서 이렇게 되었지만, 그 여인을 범하지 말고 빨리 돌려보내라고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사라의 몸을 보호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네가 그 여인을 범할 때에는 정녕 너와 네 가족이 다 죽을 것이라고 엄히 경고’하고 계십니다. 사람이 착하고 의롭게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 받고 사랑 받는 까닭은 택함을 받았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녀가 우리의 자녀 되었다는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택하셨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가 잘났건 못났건 간에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8~10절에,
아비멜렉은 하나님께 항의했을 뿐 아니라 아브라함을 불러서 따졌습니다. “내가 도대체 너에게 무슨 해를 끼쳤고 무슨 원한을 샀기에 네가 나와 우리나라를 큰 죄에 빠지게 했느냐?”라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금의 상황에 대한 정확한 질문이었습니다.
11~13절에서 아브라함이 이 질문에 대한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대답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답변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한 첫 번째 이유는 이곳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혹시 누군가 아내를 빼앗기 위해 나를 죽일 것 같아 두려웠기 때문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사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두 번째 이유는 그것보다 좀 더 황당합니다. 아브라함은 실제로 이 여인은 나의 이복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누이였습니까 아니면 아내였습니까? 누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인척관계에 있어서 누이라고 할 만한 이유가 있더라도 사라는 ‘누이’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아내’였습니다. 아내는 아내이고 누이는 누이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이런 말도 되지 않는 것으로 합리화를 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아브라함이 아내와 이렇게 약속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비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셨을 때 어디를 가든지 자신을 아내라고 하지 말고 누이라고 하자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둘이서 한 약속이지 이것이 변명거리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잘못 판단하면 주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그 주변에 있는 사람이 모두 피해를 보게 됩니다.
아비멜렉은 이렇게 변명하는 아브라함에게
14~16절에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종들을 이끌어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의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라 하고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가리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해결 되었느니라”
아비멜렉이 거꾸로 하나님의 사람처럼 행하고 있으며 진짜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아브라함은 변명하고 거짓말하는 초라한 모습입니다. 아비멜렉은 자기에게 형편 없는 이유로 자기를 속여 하나님께 엄중히 야단 맞게 한 아브라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양과 소와 노비를 보내서 그를 후대했습니다.
17~18절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 모든 태를 닫히셨음이더라”
아비멜렉에게 양과 소와 노비와 부인과 은 일천 개를 받은 아브라함은 너무나 미안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셔서 사라를 데려 갈 때부터 닫아 두셨던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다시 다 풀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세 가지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와 연약함을 아시고도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도덕성, 우리의 윤리, 우리의 선행에 상관 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나이에 상관 없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아브라함만 실수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5절에 보면 사라도 거짓말을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 다 거짓말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에게 약속의 자녀를 주시고 믿음의 사람으로 삼아 주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실수가 많고 연약한 인간이지만 하나님의 절대 선택과 절대 사랑 때문에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자녀 삼아주십니다.
두 번째 사실은 비록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아니한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선택 받은 사람과 똑 같은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께서 동일한 복을 베푸신다는 사실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사람의 기도가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7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구약의 최초의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상하게도 ‘아브라함의 기도로 네가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의 잘못으로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것인데도 아비멜렉에게 오히려 아브라함의 기도를 받으라고 명하십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후대한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잘못했지만 하나님의 선지자이기에 양과 소와 노비와 은 일천 개를 그의 아내와 함께 돌려 보냈으며 아브라함의 기도를 받았습니다.
택한 자의 중보기도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롯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하여 기도할 때 그 집의 닫혔던 태를 모두 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택한 자의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택한 자의 기도는 가정을 살릴 수 있습니다.택함받은 자의 기도를 통해 이 민족을 고치시며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함 받은 자의 기도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해야할 이유가 있다면 택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하나님아버지 감사합니다.
젊어서나 나이가 들어서나 죄악가운데 빠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를 사랑하시고 자녀삼으셨다는 이유만으로 사랑해주시고, 용서해주시고, 인도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을 일치 않고 지켜나가게 하시고, 주님 주시는 능력으로 아버지의 영광을 드높히는 자녀되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속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2. 아브라함의 잘못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대처하셨나요?
3. 아브라함의 거짓말에 대하여 아비멜렉이 취한 행동은 무엇인가요?
4. 본문을 통해 깨달을 수있는 세 가지는 무엇인가요?
(작성:김순식)
인생을 망치는 편견 < 창세기 20장 1절부터 18절>
설교영상 https://youtu.be/xbbNEgMGxzE
오늘 우리가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이 한 구절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20장 10절 말씀인데 이 구절은 두 사람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은 약간의 추궁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럼 아브라함이 무엇을 잘못하였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20장 2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습니다. 데려간 이유는 자신의 아내를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구절들은 이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아비멜렉에게 임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창세기 20장 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에게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은 남편이 있는 여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네가 죽으리라는 말은 원문을 보면 너를 보라 라는 감탄사로 그 자신이 어떠한 처지에 있는지를 깨달으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네가 죽으리라는 말인데 이 말은 너는 죽은 자이다 또는 죽어가고 있는 자이다 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는 지금 살아 있지만 죽은 자이며 죽어가는 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면 시기의 문제지 피할 수 없고 도망할 수 없기에 너는 이미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 일은 아비멜렉에게는 큰 공포와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아비멜렉은 두려움과 공포가운데 하나님께 자신을 변호하는데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를 아직 가까이 하지 않았기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십니까? 아비멜렉은 자신의 삶이 의롭다는 것이 아니라 이 일로 자신이 죽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후에 다시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돌려보내면 죽이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만나서 묻는 10절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너는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에 대한 이유를 말하는데 창세기 20장 11절을 보면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 때문에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편견이 나오는데 그는 그렇게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누구 한데 물은 것도 아니고 자신의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든 것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생각은 아내를 아비멜렉에게 빼앗기고 되찾는 과정에서 그리고 그가 남들을 속이는 이는 과정에서 두 가지의 잘못된 하나님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나게 되는데 첫째는 그가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는 말 속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즉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은 자신을 보호하거나 자신의 아내를 지킬 수가 없는 분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오늘 우리의 문제이기 하고 하나님을 믿으려 하는 이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사는 동안에 때문에 보고 듣는 것과 부딪히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도 이것은 어쩔 수 없어, 하나님도 해결하지 못하시지, 내가 믿는다고, 기도한다고 해서 내 상황이 좋아지거나 문제가 해결 될 수 있겠어라는 절망이 이미 학습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신앙이 무기력감에 빠져서 하나님을 기대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편견이 얼마나 강한지 아브라함은 아내를 빼앗기는 사건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그는 애굽왕 바로에 의해서 한번 자신의 아내를 빼앗긴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책망하고 징계하심으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다시 돌려 받게 하십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상황이 바뀌었다고 환경이 바뀌었다고 하나님의 약속이 변경되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8장 14절을 보면. 여기서 기한이 이를 때에 라는 말은 1년 후에 라는 말입니다. 그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누구에게 하시는가 하면 아브라함에게 하시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이 없으신 하나님께서는 내년 이 맘 때에 너는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비멜렉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사라를 통하여 아들을 낳을 때까지 죽을 수 없는 자이며, 그의 아내 사라는 아비멜렉의 아들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아들을 반드시 낳을 것이기에 결코 다른 이의 아내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이 약속의 말씀을 믿었더라면 그가 하나님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은 이런 불신자들 사이에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약속을 지키기 어려울 것이야 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잠언 3장 5절을 보면 [잠 3: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라고 합니다. 여기서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에서 명철은 understanding 또는 insight 로 번역 되는데 너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이해나 판단력이나 분별력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적용하면 너의 편견에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어리석은 편견을 버리고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편견을 극복하는 길이며 우리의 삶이 온전해지는 길입니다. 편견은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내 안에 편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날마다 직시하고 주의하며 오직 하나님께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창세기 20장 강해, 두 번째 겪는 씨의 위기의 의미
창세기 20장 강해, 두 번째 겪는 씨의 위기의 의미
노승수 목사
창세기 20장은 창세기 12:10-20의 애굽 기사의 반복처럼 보인다. 12장은 바로와 관련한 기사이고 20장은 에비멜렉과 관련한 기사라는 차이점을 제외하면 둘은 같은 내용, 곧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는 기사다. 이를 두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같은 사건의 다른 자료의 기사의 배치라고 본다. 내용의 유사성 때문에 각기 다른 전통의 기사가 편집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좀 더 본문을 유심히 보면, 독특한 지점이 있다. 예컨대, 12장의 기사는 3절의 예언의 성취이자 씨에 관한 계시 후 닥친 첫 번째 위기라는 점이다. 이 사건 후 아브람과 롯 간에 분쟁이 생기고 갈라선 후(13장), 발생한 전쟁에서 롯을 구하고 오다가 멜기세덱을 만나 계시를 듣는 사건으로 이어진다(14장). 그리고 15장에서 아브라함은 이신칭의의 거듭남을 경험한다. 16장을 통해서는 혈통의 씨가 참 씨가 아니라 성령의 씨가 진짜 씨라는 점을 계시하고 17장에서는 할례언약을 통해서 마음의 할례, 곧 성령을 보증하신다(엡 1:13, 행 1:4, 갈 3:14). 18장에서는 이삭의 출생의 약속과 심판의 중보가 그리고 19장에서는 심판이라는 구조로 이뤄져 있다.
그리고 다시 12장과 같은 행태의 사건으로 돌아 간 것이다. 이는 바로가 꿈꾼 두 꿈은 하나이며(창 41:25), 이 두 사건이 거듭되는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기 때문이다(창 41:32). 12장에서 바로 기사가 있고 난 후에 15장에서 약속이 있었던 것처럼 20장에서 아비멜렉 기사가 있은 후 그 구체적 징표인 이삭이 출생한다(21장). 16장에서 이스마엘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 것처럼 21장에서는 이스마엘을 내쫓는다. 성령의 약속 후에(18장), 19장에 심판이 오는 것처럼 이삭의 출생 후에 22장에서 모리아 산에서 심판이 온다. 창세기 22:2의 모리아 산은 역대하 3:1에서 보면 예루살렘이며 다윗이 계시를 받은 타작마당이다(대하 3:1). 이 장소는 사무엘하 24장을 보면 아리우나의 타작마당이다(대상 21:15 비교). 이 타작마당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그치게 그 진노가 누끄러뜨려지고 화목케 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이며 이 장소에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다. 바울은 이 진노의 누그러뜨림을 로마서 3:25에서 화목제물로 묘사했다. 마태복음 3장의 세례요한, 곧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여자가 난 자 중에 가장 큰 자, 구약 계시로서 그리스도를 최후로 묘사한 요한은 바로 이 타작마당의 이미지를 통해 그리스도의 심판을 그린다. 그리스도의 길을 바로 알곡은 모아 곡간에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던지실 적을 예표한 것이다. 그가 오해한 것은 이 심판이 바로 그리스도 자신에게 이뤄질 것이라는 점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가 창세기의 하나님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로서 아브라함의 삶의 계시를 살펴보는 중에 두번의 반복은 이 일이 확정되었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차이를 보이는 지점은 바로 18-19장에서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주로서 또 그 일에 아브라함이 정의와 공도로 함께 다스릴 것이라는 점에 강조점이 있었다면 22장의 모리아산의 계시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서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니라 자기 아들을 준비하심을 계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데라 톨레도트로서 아브라함의 기사는 12-19장과 20-22장으로 나뉠 수 있고 그 기점이 되는 사건이 바로 씨에 대한 위기와 침습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하나님 통치의 도래이며 이 통치는 바로 죄를 진멸하고 하나님의 정의와 공도가 시행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일을 우리 스스로 이룰 수 없기에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 구원얻을 길이 있다면, 다시 말해서 율법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가 증명해주듯이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선에 이르러 구원을 이를 수 있는 이가 없고 하나님의 의의 조건을 충족할 이도 없다. 이로서 우리 운명은 진노의 길 외에 달리 다른 길이 없었으나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으로 진노의 길이 아니라 사랑의 길이 열린 것이다. 우리가 지난주 배웠던 19장의 사건 역시 진도 중에서 하나님의 세심하신 살피심과 아브라함의 중보로 드러난 대로 자비하심이 롯의 구원의 과정에서 보여진 것처럼 그 계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일, 곧 자비의 구원이 펼쳐진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이다. 우리는 단지 믿음으로 이 길에 무임승차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창세 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나눈 그 사랑에(요 17:24) 우리가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믿음으로 연합하는 길 외에는 없다(롬 6:5). 그래서 믿음은 바로 이 구원 역사를 계획하시고 실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지식이며 그의 약속에 대한 무한한 신뢰이다.
그런 점에서 20장의 사건은 단순히 12:10-20의 반복이 아니라 계시의 점증으로 읽어야 한다. 12장에서는 단지 부르심을 입은 구도자였다면(15:6에서 중생함), 20장에서는 선지자로 소개된다(20:7). 아브라함의 이런 면모는 이미 19장에서 드러났으며 이 중보는 그리스도의 예표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가 된 것은 바로 15:6의 이신칭의의 사건으로 거듭나고 18장의 할례언약으로 성령을 보증으로 약속받는 사건 후의 일이다. 그의 중보로 진노가 거둬질 것이라는 계시가 아비멜렉에게 꿈으로 주어진다(20:7). 이에 따라 아브라함의 기도로 아비멜렉의 집이 치료된다(20:17).
여기에 더해 20:3-6에서 보듯이 아비멜렉은 사라를 가까이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현몽하셨다. 미리 막으실 수 있는 일이지만 사태가 벌어진 후에 수습을 하신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 문제 곧 사라를 누이라 소개하는 문제에서 사라와 이미 합의를 오래 전에 본 상태다(20:11-13). 사단의 궤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비상한 간섭으로 아브라함과 사라로부터 날 씨를 보호하셨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은 태의 열고 닫음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다시 한번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깨닫게 하신다. 그들이 처음에 생각하던 것처럼 21장의 이삭이 단지 혈통에 의한 출생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출생이라는 점을 이 아이러니한 사건을 통해서 교훈하신다. 아마도 사라가 임신이 임박하면서 전에 임신할 수 없었던 상태, 곧 생리가 끊어진 상태가 개선되면서 노파가 아니라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을 회복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아비멜렉이 유혹을 받았을 것이고 이런 일이 생길 때 부부가 통상적으로 해오던 것을 해온 것뿐이다. 우리가 교훈 받아야 할 부분은 선한 일이 가까이 올 때, 악한 일도 함께 온다는 것이다. 이 시험에서 신실한 자가 승리한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이 일에 개입하심으로 이것이 단지 혈통의 출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선지자가 약속의 후사를 잇는 사건이라는 점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의 여정을 통해서 믿는 것과 아는 일에서 하나가 되어 자라갔다(엡 4:13). 이 아브라함의 복이 우리의 복이며 우리가 누릴 영적 지위를 보여준다. 정의와 공도를 행하시기 위해서 심판의 문제도 아브라함과 나누셨다. 오늘 본문에서는 세상의 태의 열고 닫음과 망하고 일어섬이 아브라함의 기도에 달렸다. 우리를 이런 자리로 부르신 것이며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 나라 백성이 누리는 영적 지위가 이와 같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창 20:1-18)
설교 동영상: https://youtu.be/eSB6iiZCfUM?t=3525
2020년 6월 7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13 ✦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20장 1~18절)
[ 들어가는 말 ]어떤 실수를 반복해서 저지른 경험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했지? 다시 이런 일을 하나 봐라. 다시는 이런 실수를 안 해야지.’ 하고는 또 같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만약 그런 경험이 있으시다면, 왜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우연입니까? 아니면 어쩌다 보니까, 상황이 그렇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입니까?
사실은 그 부분이 자기 내면의 약점입니다. 어떤 이야기가 나오면 심장이 뛰고 어쩔 줄 모르는 부분, 굉장히 긴장되고 불안해지는 부분, 또 자기 삶에서 반복되는 실수를 저지르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어쩌다가 또 실수를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그 부분에 대한 상처가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처가 아직 다 해결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몇 주 전부터 아브라함을 살펴보고 있는데, 그가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로부터 수많은 민족들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그런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고, 오히려 수많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르는 가운데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조금씩 믿음이 자라가고 성숙해진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도 역시 우리와 같이 많은 문제들과 어려움에 직면했지만, 그런 상황들을 그가 어떻게 헤쳐 나갔는지를 보면서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을 얻기 위하여 그의 삶을 살펴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전에 살펴보았던 12장에서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왔는데 거기 기근이 드니까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결국 애굽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 갔을 때 사람들이 사라로 인해 자기를 죽이고 빼앗을까봐 사라를 자신의 누이라고 부르기로 했는데, 오히려 애굽 왕 바로에게 사라를 빼앗겼던 경험을 했습니다. 그 당시 고대사회에서 남의 여자를 강탈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염려한 아브라함이 나름대로 수를 쓰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스스로 꾀를 냈다가 자기 꾀에 자기가 빠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아브라함을 위기에서 구하시고, 오히려 많은 재물과 짐승과 종들을 얻어서 애굽에서 나와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때로부터 25년이 흐른 시점인데, 25년이 지난 지금 아브라함은 또 다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을 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때 애굽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다는 말입니까? 사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마음에 뭔가 문제가 남아 있었다는 것, 아직 상처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우리가 오늘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아브라함의 반복된 실수의 진짜 원인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1절)
19장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한 다음, 아브라함은 원래 살던 중부 세겜 지역으로부터 남방으로 이사하는데, 남쪽 광야에 가까운 가데스와 술 사이에 있는 그랄로 갑니다. 나중에 이곳이 블레셋이고 상당히 남쪽 광야에 가까운 곳입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기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그 결과도 똑같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2절)
그랄에 와서도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아비멜렉이 사라를 데려갑니다. 왜 이때도 또 누이라고 했습니까? 뒤의 11절에 보면 그가 그곳 사람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곳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혹시 자기를 해치지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이제 아내 사라를 그랄 왕 아비멜렉이 데려가는데, 큰 위기에 빠진 겁니다. 애굽에 갔을 때는 아직 그 약속을 받지 않은 때인데, 바로 얼마 전에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셔서 ‘내년 이맘때쯤에 사라를 통해 아들을 낳을 것이며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내 사라를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빼앗깁니다. 그러면 이삭을 어떻게 낳습니까? 그러니까 엄청난 위기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위기일 뿐만 아니라,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후손이 나오도록 하는 하나님의 계획에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때 또 다시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3절)
아브라함과 사라가 서로 ‘오빠 동생’이라니까, 그랄 왕 아비멜렉은 별 생각 없이 사라를 취하여 들이게 되는데, 그날 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너는 죽을 것이다. 왜냐하면 네가 남의 아내를 취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때 아비멜렉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4-5절)
아비멜렉이 사라를 아직 가까이 하지 않았는데, 주님은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했고 사라도 아브라함이 자기 오빠라고 했으니까, 아비멜렉은 그냥 순수하게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했다고 대답합니다.
아비멜렉의 이러한 말은 사실입니다. 아비멜렉이 잘못한 게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사라가 자기 누이라고 했을 때 왜 그것을 무조건 믿고 맞아들입니까? 나이가 90이 된 여인이 왜 지금껏 혼자인지 알아보지도 않습니까? 또한 아비멜렉은 이미 아내와 첩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왜 또 다른 여인, 그것도 나이가 많은 여인에 대해 욕심을 부립니까? 그러니까 아비멜렉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는 아브라함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이제 곧 약속의 후사를 낳을 사라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보호를 해주어야 하는데, 아직도 사라를 방패로 삼아서 자기가 보호를 받겠다는 것부터가 잘못입니다. 자기 누이동생이라고 해서 빼앗기는데, 애굽에서 그렇게 호된 경험을 하고도 아직 깨닫지 못한 것입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좀 이상합니다. 왜 또 아브라함이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지 사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아브라함이 잘못 생각하더라도 25년 전에 그토록 호된 경험을 했는데 또 이러겠습니까? 정상적인 상태라면 아브라함이 똑같은 실수를 또 범할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마음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점이 그의 약점이고 콤플렉스였던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새로운 곳에 가거나 새로운 사람들에 둘러싸이게 되면 항상 이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죽이고 내 아내를 빼앗아 갈 것이다. 그래서 아내를 누이라고 하자. 그러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 90세가 다 된 자기 아내를 누가 빼앗아 간다고 그렇게 생각을 합니까? 옛날에는 그렇게 생각해도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이제 사라는 정말 할머니(90세)입니다. 그 당시 나이로도 적지 않은 나이입니다.
그런데 ‘내 아내를 빼앗아갈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거의 병적 수준이고, 굉장한 강박 관념입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이 왜 이런 병적일 정도의 강박 관념을 가지게 된 것입니까? 왜 그랬나를 정확히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자라면서 가정환경과 주변 환경에 따라 그렇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아브라함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중에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자녀들 중에는 이곳에서 태어난 경우가 많지만 1세들 중에는 없습니다. 한국이나 중국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미국 시민권을 가졌다고 해도 이방인이고, 심지어 이곳에서 태어나 날 때부터 시민인 우리 2세들도 온전한 미국인으로 취급받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완전히 영어권이고 한국말도 잘 못하지만 겉모습만 보고 미국 친구들이 악의 없이 “Where are you from?”이라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 이민자나 유학생으로 이 땅에 와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우리는 잘 알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보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한국에만 사는 사람들보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도 이민자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부르실 때 믿음으로 순종하여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으로 갔는데, 그곳이 가나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땅에서의 삶은 불안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 불안정한 생활이 오래 지속되다 보니까 두려움이 쌓이게 된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도 물론 있었겠지만, 특히 가나안 생활을 통해 얼마나 불안하고 두려웠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의 이러한 증상이 굉장히 심합니다. 이전에 자기 조카 롯이 소돔에 살다가 그돌라오멜이라는 왕이 연합군을 이끌고 와서 소돔 사람들을 잡아갔을 때, 아브라함은 자기 집에서 기른 318명의 용사들을 데리고 가서 물리치고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용맹한 군사들이 300명 이상이나 있는데, 그렇다면 지금 누가 와서 감히 자기 아내를 빼앗아 가겠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지나친 망상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애굽에 갔을 때도 그랬고 이제 그랄에 와서도 그렇고, 이집트에서의 경험 때문에 군사들을 길러서 이제는 강력한 군사력도 있는데,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고 사라를 빼앗아갈지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의 방랑과 나그네 생활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이민 온 지가 올해 가을이면 34년이 됩니다. 그러니까 미국에서 산 시간이 한국에서 살았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래 되었습니다. 저보다 훨씬 오래 되신 분들이 우리 교회에 많이 계십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 미국에 와서 교회에 가보고 느낀 것 중 하나는, 이민교회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상당히 많이 바뀌고 발전도 많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제가 동남부 쪽에 있었는데, 교인들이 교회를 너무 자주 옮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번에 만났을 때는 이 교회 직분자였는데 1년 후에 만나니까 다른 교회의 직분자였고, 또 그 1년 후에 만나니까 또 다른 교회의 직분자가 되어 있는 겁니다. 그것이 너무 이상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런 것을 못 보았는데, 미국에서는 정말 사정이 있어서 옮기는 게 아니라 주로 다투고 싸우고 갈라지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겁니다.
다투는 일도 정말 별 것 아닌 일이나 이슈가 될 수 없는 일로 열을 내며 싸우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나중에 보니까 한국에서 제가 몰랐던 것이지 한국에도 많았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민교회에 그런 일이 더 많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제가 ‘앞으로 나도 이민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될 텐데, 이거 무서워서 하겠나?’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 와서 15년 이상 여러분과 함께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민교회에서 일어나는 그런 현상들에 대해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특히 미국생활에 끼지 못하는 열등감과 소외감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렇게 잘 살고 있지만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혹시 갑자기 잘못 되면 어떡하나?’ 하는 긴장과 불안이 항상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 나라가 아닌 남의 나라에 와서 사는 것은 항상 불안하고 피곤합니다. 이 사회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더라도 그 스트레스가 많습니다.
다 아시는 것처럼, 저번 주에 흑인인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라는 사람이 백인 경찰관에 의해서 목이 눌려 숨지는 사건이 일어나서 전국적으로 시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약탈과 폭동은 많이 잦아들고 평화로운 시위가 주를 이루고 있는데, 어제도 뉴스를 보니까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뿌리가 깊습니다. 17세기부터 시작된 미국의 아프리카 노예 제도로 인해서 흑인들의 마음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의 상처가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부로 ‘흑인은 이렇다.’라고 하거나 백인도 종류가 많기 때문에 ‘백인은 이렇다.’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렇다.’라고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노예로 끌려와 산 것이 상처로 남아 있고, 불안과 두려움의 상처가 있습니다. 이게 쉽게 치유가 안 됩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을 붙들었는데, 흑인영가를 보십시오. 그 가사와 음정이 심금을 울립니다. 그런 것은 그냥 나온 음악이 아닙니다.
남의 나라에서 사는 사람은 언제 어떻게 쫓겨날지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이 늘 마음속에 있습니다. 지금 직장생활을 잘 하시는 분들도 ‘코로나도 그렇고 실업자가 많은데 언제 내가 잘리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시대 때부터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과 함께 나그네 즉 외국인을 돌보라고 계속해서 강조하셨습니다. 고아와 과부는 사회의 가장 밑바닥이고 전혀 보호를 받지 못하는 계층인데, 외국인을 그들과 똑같은 급으로 쳐주신 겁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도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았던 것을 기억해라. 너희가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았는데, 그 아픔을 알면서 너희와 똑같은 고통을 당하는 너희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착취하면 안 된다. 돌봐주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두려움의 상처란, 마음속에 부적절한 두려움이 자주 찾아오는 것으로, 그것 때문에 마음의 평안이 없어지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고통을 받는 마음입니다. 사실 어떤 일이 일어날 때 그렇게까지 놀라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데, 과거에 받았던 어떤 상처 때문에 그것이 두려움이라는 형태로 숨어서 자리 잡고 있다가 어떤 상황에서 부적절하게 감정이 튀어나오는 것이 두려움의 증상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이라는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이민자가 그렇습니다. 어릴 때 왔거나 2세, 3세는 그렇지 않은데 1세들에게 상처가 많습니다. 특히 1.5세가 가장 그렇습니다. 12~14세쯤에 온 그들에게 상처가 많습니다.
결국 자신의 안전을 위협받거나 안정감을 잃어버리는 순간 갖게 되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과거의 어떤 경험들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하고 마음속에 남아 있다가 부적절하게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면 문제가 해결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묵상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담대히 그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두려움의 상처를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내려놓지 않고 계속 내가 들고 가고 지고 가면, 언젠가는 그것이 눌리고 눌리고 눌리다가 뻥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기는 겁니다. 하나님이 처리하시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개입과 해결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인 사라를 누이라고 하니까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데려가는데, 이때 아브라함의 마음을 생각해보십시오. ‘25년 만에 또 이런 상황이 생겼구나?’ 하며 얼마나 괴롭고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자기가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이라 그렇게 한 게 아닙니까? 그런데 자기가 상상하던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사실 이렇게 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한 것인데,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불안하고 초조해서 방법을 썼는데 오히려 그것 때문에 아내 사라를 빼앗겼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가만히 있지 않으시고 바로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이 놀라운 역사로 함께 해주십니다. 이 상황은 아브라함이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이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얼마나 간절히 울부짖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을 때,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시고 역사하셨습니다. 아비멜렉에게 병을 주시고 꿈에도 나타나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아비멜렉이 결백을 주장했습니다(4-5). 그런데 나중에 보면 알 수 있는 것이, 아비멜렉도 병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때 어떻게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자기가 모르고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사라가 자기 누이라고 했고, 또 사라도 아브라함을 자기 오빠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둘 다 거짓말을 했다는 겁니다. 그에 대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6절)
하나님은 아비멜렉이 순수한 마음으로 한 줄을 아십니다. 그래서 그를 막아 범죄하지 않도록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아비멜렉이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는지 말씀하십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7절)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가리켜 선지자라고 하시고 또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해줄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아비멜렉은 지금 아브라함을 해칠 수도 있고 간단히 죽여버릴 수도 있으며 그냥 둘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아비멜렉과 그에게 속한 자가 다 죽을 것이라고 강력히 경고하시며 초강수로 나오십니다.
“아비멜렉이 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종들을 불러 그 모든 일을 말하여 들려주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 (8절)
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아비멜렉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신하들을 불러 간밤에
일어난 일을 말합니다. 그러자 모두 다 두려워합니다. 아비멜렉은 이제 장본인인 아브라함을 불러 왜 이렇게 행했느냐고 따지기 시작합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9-10절)
아비멜렉이 지적하는 것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에게 잘못하거나 죄를 범한 것도 없는데 자기들로 하여금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아주 정확한 지적입니다. 그래서 또 물으며 대답해보라고 하는데, 이때 아브라함의 대답은 참으로 구차하고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11절)
그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 아내를 인하여 자기를 죽일까봐 그렇게 했다고 대답합니다.
조금 전 언급한 두려움의 증상들이 몇 가지 있는데, 첫째가 ‘지나친 불안과 걱정’입니다. 별 일도 없는데 불안감이 늘 떠나지를 않는 겁니다. 때로는 다 평안한데도 아무 이유도 없이 더 심하게 두려워집니다. 무엇인가 무너질 것 같은 격렬한 두려움이 생기기도 하고, 어떤 때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은근한 두려움까지, 여러 두려운 마음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는 중에 실제로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필요 이상으로 놀라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사실은 그런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도,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거나 기정사실로 여기면서 절망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두려움의 상처가 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한 부부가 있는데 아내가 아이들을 위해 내일 싸주어야 것을 깜빡 사오지 않아서 그로서리에 가서 사오겠다고 하며 나갑니다. 저녁 8시쯤 나갔는데 9시가 되도록 안 들어옵니다. 아내의 입장에서는 이왕 나갔으니까 여기도 가서 사고 저기도 가보면서 끝날 시간까지 일을 보고 오려는 것인데, 남편은 20~30분이 지나니까 걱정이 됩니다. 9시가 되었는데도 안 들어오니까 상상을 하기 시작합니다.
‘나갔다가 차가 와서 꽝 받아 교통사고가 나고, 앰뷸런스가 와서 실려 가고, 응급실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거기서 죽고, 그러면 장례는 어떻게 하나? 우리 애들은 어떻게 하나? 그럼 나는 재혼을 해야 하는 건가, 안 해야 하는 건가?’ 그런데 그 순간 아내가 들어오는 겁니다. 쓸데없는 상상의 나래를 펴는데, 왜 그렇습니까? 두려움 때문입니다. 아내가 잠깐 나갔다 오는 것을 가지고 자기가 재혼하는 것까지 상상하고 있으니 말이 안 되는 건데, 이런 것이 실제로 우리 가운데 벌어지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딱 이겁니다. 아내로 인하여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까 생각했다는 것은 완전히 자기 혼자 생각입니다. 혼자만의 상상입니다. 지금 자기에게는 강력한 군사들도 있는데 아내를 어떻게 빼앗아가고 어떻게 자기를 죽입니까?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해 지나치게 불안해하며 걱정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의 또 다른 증상은 ‘책임 전가’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당신 잘못이다’ 하고 책임 추궁을 당할 것이 두려워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두려움의 상처를 가진 사람들의 여러 특징들 중 하나가 절대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통 생각에 ‘저 사람은 고집이 정말 세다.’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게 두려움이라는 상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상처를 가진 사람은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잘못했다고 말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겁니다. 두려움 때문입니다.
여기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뭐라고 합니까?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라고 합니다. 책임 전가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지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 자신입니다. 아비멜렉이 아니고 그랄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내가 그랬다.’ 하고 책임 전가를 합니다. 두려움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언급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더 기가 막히고 황당합니다.
“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 (12절)
실제로 사라는 자기 이복누이라는 점을 밝힙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합리화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로 생각하고 지금까지 같이 살았습니까? 그것이 사실이라도 사라는 ‘누이’로서 산 것이 아니라 ‘아내’로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13절)
이걸 보면, 아브라함은 자신 안에 있는 그 두려움 때문에 강박 증세를 보이면서, 어디를 가든지 가는 곳마다 자기를 오라비로 부르라고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3절을 잘 보면, 하나님이 아버지 집을 떠나 두루 다니도록 하신 것에는 순종해서 갔습니다. 훌륭합니다. 그런데 가기는 갔지만, 가는 곳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다닌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또 다른 ‘두려움의 상처’의 증상인 ‘제자리걸음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지속적인 신뢰가 늘 흔들리는 겁니다. 분명히 하나님을 믿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인 것도 알고 믿습니다. 때로는 아주 신실하게 잘 믿습니다. 그런데 어떤 상황이 생기면 믿음이 막 흔들리는 겁니다. 혹시 자기가 버림받거나 벌을 받아 무너지면 어떡하나 하는 염려와 불안이 항상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그것이 기쁨보다는 부담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적 성장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신앙의 기복이 심합니다. 좋을 때는 좋은데, 갑자기 뚝 떨어지거나 잠수를 탑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게 심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느끼지 못해서 하나님을 생각할 때 두려우신 하나님, 나를 야단치고 벌을 주는 엄한 아버지 같은 하나님, 멀리 계신 분으로 여기게 됩니다.
이것은 또한 두려워하는 마음의 또 다른 증상인 ‘집착과 중독’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내적치유에서 ‘포로 된 상태’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두려움에 의한 집착은 ‘무너지지 않기 위한 집착’입니다. 상처 중에 굶주림의 상처가 있는데, 항상 갈망하고 채워지지 않아서 늘 채우고자 하는 집착이 굶주림의 현상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에 의한 집착은 안정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추구해도 근본적인 안정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대상을 향한 집착과 중독이 됩니다.
그래서 술, 도박, 마약, 게임 등에 중독되기도 하고, 물질이나 높은 학벌이나 성공에 지나친 집착을 보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바로 가족에게 집착하는 것입니다. 배우자에게 집착하고, 자녀에게 집착합니다. 이런 집착이 커지면서 피해 망상적인 감정에 시달리게 되는데, 건강이나 사고에 대한 지나친 염려가 그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처럼 망상적인 생각, 지나친 생각을 하는 겁니다. 또 조금 전 그 어떤 사람처럼 상상을 하는 겁니다. 배우자가 나갔다 안 들어오면, 자녀가 나갔다 안 들어오면, 상상의 나래를 펴서 그 다음 계획까지 다 세워놓는 겁니다. 지나친 염려는 집착입니다.
아브라함이 딱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지나치게 염려하고, 또 사라를 보호하기 위해 집착합니다. 사실은 사라를 보호하려는 게 아니라, 자기가 두렵기 때문에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집착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분명히 사라에게 집착했는데, 자신이 집착하는 대상인 사라가 무너질까봐 깊이 염려하다가 그런 데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아브라함은 이전에 자기가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잘못했는데 그때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 땅을 떠났기 때문이었습다. 그런데 지금은 가나안 땅을 떠난 것이 아니고 남쪽에 걸쳐 있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을 수 있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괜찮지가 않았습니다.
이번에 그랄로 간 그 자체는 불순종이 아니었을지 몰라도, 여전히 사라를 누이라고 한 방법이 잘못되었습니다. 왜 잘못입니까? 자신의 두려움에서 나온 집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으로 행동한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깊은 불안과 두려움이 아직도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자기를 보호하는 벽을 친 것이고, 오히려 그것 때문에 또 다시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우리 모습과 비슷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읽고 묵상하고, 기도도 하고, 예배도 합니다. 성경지식도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지’ 하고 결단도 합니다. 그런데 막상 삶의 현장에서 어떤 일이 탁 벌어지면 그때는 다 알고 있어도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내 나름대로의 생각과 방법으로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러니까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안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면 안 될 것 같아서 나름대로 수를 써보지만, 오히려 더 안 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만 믿으면 되는데 그걸 못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원인은 불안과 해결되지 않은 두려움의 상처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무조건 믿기만 하라는 것인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가 최선을 다하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께 먼저 맡긴 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 맡기지 못한 채로 불안해하며 나름대로의 방법을 쓰는 것과는 다릅니다.
사실 오늘의 핵심은 두려워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인데 어떻게 두려움이 없습니까? 다 두려움이 있습니다. 바이러스가 얼마나 두렵습니까? 지금 시위가 벌어지고 폭동과 약탈이 벌어질 때 비즈니스를 거기서 하면 얼마나 두렵습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질문하는 것은 ‘네가 두려워하느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너는 지금 누구를 두려워하느냐?’ 이것이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가, 아니면 사람을 두려워하는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가, 아니면 상황을 두려워하는가?’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종들을 이끌어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의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라 하고,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가리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해결되었느니라” (14-16절)
모든 것을 정리하면서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양과 소와 종들을 줍니다. 또 사라를 돌려보내고, 아브라함에게 이 땅을 좋은 대로 택하여 살라고 소위 영주권도 줍니다. 그리고 사라에게는 “오라비”(16) 아브라함에게 은 천개를 주어서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풀었다고 하며 이제 다 선하게 해결되었음을 선언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십시오. 아비멜렉이 은근히 뒤끝이 있는 사람입니다. ‘네 남편 아브라함에게 줬다.’라고 하지 않고 ‘네 오라비에게 줬다.’라고 합니다. 굉장히 뒤끝이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 선언함으로써 ‘이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 너희들 잘못이다.’라는 것을 확실하게 해두려고 하는 의도도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음이더라” (17-18절)
그러니까 이때 여인들만 치료하신 것이 아니라 아비멜렉도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아비멜렉도 병이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도 병이 들도록 하심으로 사라를 보호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분명히 아브라함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붙들어주십니다. 아브라함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이렇게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개입하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아브라함이 잘못되지 않도록 또 사라가 잘못되지 않도록 보호해주십니다.
[ 나가는 말 ]여러분, 하나님은 두려움의 상처를 갖고 있던 사람인 아브라함을 계속해서 빚어 나가십니다. 두려워할 때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해주시고, 위기에 빠질 때 개입하셔서 건져주십니다. 또 다시 아브라함이 두려워할 때 또 찾아오셔서 위로해주시며 그의 마음을 돌보아주십니다. 그렇게 하는 과정을 통해 마침내 아브라함이 진짜 믿음의 조상이 되도록 키워주신 것입니다.
결국 우리 안에도 있을 이 두려움의 상처가 치유 받고 해결되는 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 하나님을 나의 삶의 진짜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려움의 상처를 치유 받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온 우주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영원하거나 안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야말로 두려운 마음에 대한 치유의 길입니다.
여러분, 지금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고 계십니까?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두려워하고 계십니까? 감염될까봐, 그래서 아플까봐 또는 죽을까봐 걱정이 되십니까? 또 지금 시위가 벌어지고 미국에 난리가 나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계십니까?
그런데 진짜 두려움의 원인은 코로나바이러스나 그런 시위나 폭동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뭔가 내 안에 있는 다른 것,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다른 것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고 하나님과 제대로 동행하지 못하고 예배에도 소홀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맡기며 살지 않는 한, 평생 두려움은 우리를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두려움에서 벗어나 참으로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나의 삶의 진짜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내 방법대로 하거나 내가 알아서 나아갈 때 잘될 수도 있고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보십시오. 자기 마음대로 갔을 때도 많은 금은보화를 얻고 종들도 얻고 짐승들도 얻었습니다. 그러니까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평생 두려움에서 해방되지 못한 채 계속 살다가 인생이 끝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매 순간 주인으로 모시고 순종하며 살아갈 때, ‘내 뜻대로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십시오.’라는 자세로 살아갈 때, 이 땅에 살면서도 하늘의 평화와 위로와 소망을 누리며 진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며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를 누리면서 그 복을 나누어주는 아름다운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매일말씀묵상. 1월 19일. 창세기 20장. > 매일말씀묵상
창세기 20장. 하나님께서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1. 본문은 아브라함이 두 번째로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임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위기에 처하게 된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12장의 사건과 달리 하나님의 약속의 땅 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2. 아브라함은 또다시 아내를 누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못하고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비겁한 모습을 보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를 “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11 절 )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라고 아비멜렉 앞에서 말합니다. 창세기 12장에서도 그는 동일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물론 인간은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존재가 그렇습니다.
3. 그러나 아브라함의 더욱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는 “ 세상을 두려워함 ” 입니다 . 그로 인하여 습관화된 죄된 본성입니다 . 세상 어디를 가나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으므로, 아내 사라로 인하여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누이라고 하고, 더 중요한 아내로서의 신분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아내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가지는 세상에서의 고독 , 두려움 , 이질감이 아닐까 합니다 . 인간 내면 더욱 깊은 곳에서 솟아나오는, 무의식에 가까운 자기 방어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로써,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써 당하는 위험을 모든 기독교인들은 알고 있습니다 . 그래서 의식 수준 그 이상의 더욱 고착화되어버린 , 습관화 되어 버린 , 본인조차도 알지 못한 채 , 굳어버린 죄의 모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
4. 아브라함은 지금 세상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 하지만 지금은 12장의 때와 사정이 다릅니다. 자신과 사라를 통하여 후사를 주실 것을 약속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니 더욱 사라의 태를 보호해야만 하는 때입니다.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라를 이방인에게 내어주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방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더욱 강하게 그 안에 자리잡은 오래 묵은 죄와 연약함을 처리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 다시 한 번 이방인 앞에서 그의 죄악의 수치가 드러나게 하신 것입니다 . 그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 오래된 죄와 맞닥뜨리게 하심으로써 이제는 이 죄의 처리가 불가피함을 보이셨습니다 . 소돔과 고모라 앞에서는 목숨을 걸고 이방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던 아브라함이, 이방인 앞에서 수치를 당하고 있습니다.
5. 그러나 이러한 아브라함의 실패와 연약을 하나님께서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 아비멜렉으로 하여금 사라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하심으로 사라의 태를 보호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수치를 드러나게 하심과 동시에, 그가 가지는 복된 지위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를 하나님의 선지자라 칭하신 것입니다 (7 절 ). 선지자라 칭함을 받을만한 상황이 전혀 아닙니다 . 그 어느 때보다도 아닙니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앞에서 아브라함의 지위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해주시고,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모든 세상 나라와 이방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구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격 없는 아브라함이 기도하니 하나님의 복이 다시 열렸습니다 (17-18).
6. 롯의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롯을 구원하신 것처럼, 아비멜렉의 경우에도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비멜렉과 그의 집의 태를 다시 열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도 없이도 하나님께서는 일하실 수 있지만 , 아브라함의 기도를 통하여 일하셨습니다 .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이 선지자임을 알리시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 은혜와 축복을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그래서 자신에게 허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라에게 예를 다하였고, 아브라함에게도 호의를 다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을 통하여 만민이 복을 얻게 하시겠다고 하셨던 그 복된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고 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늘 동일한 죄를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다시는 그 죄를 짓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결단하면서 여전히 늘 지었던 그 죄를 다시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두렵기 때문입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죄를 짓지 않고 살만도 하지만 여전히도 동일한 죄를 반복하며 사는 것은 세상이 참 무섭기 때문입니다. 그러함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우리를 보호해주십니다.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여 주시고, 긍휼히 여겨주십니다. 그 사랑과 은혜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곳에서 살아 있음을 믿습니다.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그 은혜의 날개 안에 살아가도록, 그러한 중에 죄를 끊으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제20장 강해
창세기 제20장 강해 –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본 장에서는 아브라함의 두 번째 실수와 그 실수를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기사의 내용입니다. 애굽에서의 첫 번째 실수가 있은 뒤 24년이 지난 후에도 동일한 실수를 했다는 것은, 아브라함 당시 영적 상태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이라고 하는 부족하고 연약하여 늘 잘못을 저지를지라도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돌보시기 때문에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의 시민으로 살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합니다.
1: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며
아브라함은 롯과 이별한 뒤에 거의 20년 동안 머물던 헤브론의 마므레 상수리 수풀을 떠나 가사 남방 약 16km 지점인 그랄(26:1)로 이주를 하였습니다. 남방은 ‘네게브’ 지역으로 사해와 지중해 사이의 땅입니다. 어떤 연유에서 이주를 하게 되었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유목민들은 좋은 목초지를 찾아다니기 때문에 아브라함도 새롭고 좋은 목초지를 찾기 위해 이주하였거나, 아니면 ‘마므레’와의 알지 못하는 관계가 있어서 떠났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여전히 이방인으로서 나그네로서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어 사라를 취하였더니
20년 전 아브라함이 애굽의 바로 왕을 속인 것과 동일하게 그랄 왕을 속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잘못을 할 때에 책망을 받았으며 그 후 몇 차례에 걸쳐 하나님의 현현(顯現)을 통해 은혜를 체험하기도 했습니다(15:6;17:16). 그러나 아브라함은 또 다시 동일한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롯과의 작별이후 별다른 큰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안일한 가운데 그의 신앙이 연약해졌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또한 누구든지 인간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동일한 잘못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때 사라의 나이는 이미 90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아직 이삭이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89세입니다. 이렇게 나이가 많은 사라의 어디가 아비멜렉의 마음을 사로잡아 후처로 삼으려고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당시에는 부족과 부족이나 어느 정도 힘을 가지고 있는 세력끼리는 혼인관계를 맺어 상호 우호와 견제를 하였으므로 그들도 정략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3: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하나님께서는 가끔 제한적이고 부분적으로 이방인들에게도 꿈으로 계시를 하셨습니다.(41:1;단 4:5)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에게 죽을 것인데, 그 이유는 남의 아내를 취하였기 때문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이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후손을 통한 선민을 이루려고 하신 하나님께서 사라의 순결을 보호하시기 위한 경고입니다.
4: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아니한 고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아비멜렉은 일단 사라를 자기의 처소로 데려오기는 하였지만 아직 동침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의롭다고 하나님께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통하여 인근에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경배하지는 않았으나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아비멜렉 자신도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두려워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5: 그가 나더러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사라의 이복 오라비였습니다(12절; 20:12). 그러나 이런 사실도 속임수의 수단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에는 저촉되는 것입니다. 이미 부부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은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한 것은 사라가 남편이 없었기 때문이며, 강제적이거나 다른 술수에 의한 것이 아닌 아브라함과의 정상적인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6: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이 왜 사라를 취하였는지를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아비멜렉이 잘못이 없기 때문에 꿈으로 계시하셔서 사라와 동침하지 못하도록 조치하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다른 여인을 취하면 당일 밤에 동침을 하게 되지만, 아비멜렉의 경우에는 혼자 잠이 든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어떤 조치 즉 몸이 아프게 만드셨든지 하는 조치를 취하셔서 사라와 동침하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7: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
아비멜렉이 사라와 동침하게 되면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되기 때문에 사라를 돌려보낼 것을 명하셨습니다. 만일 돌려보내지 않으면 아비멜렉과 그가 다스리는 나라의 모든 백성이 다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선지자이므로 너를 위하여 기도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과 백성의 사이를 연결하는 직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하여 하나님께 중보 기도하므로 아비멜렉은 생명을 보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8: 아비멜렉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신복을 불러 그 일을 다 말하여 들리매 그 사람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
아비멜렉이 일찍 일어나서 모든 신복을 불러서 자초지종을 다 말했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비록 모르고 사라를 취하기는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알려주심으로 그 일이 죄가 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밝히는 것입니다. 이에서 아비멜렉의 성품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겸허한 모습은 하나님의 징계를 거두게 하였을 것입니다. 신복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미 그들도 하나님께서 어떤 존재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9,10: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리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관대 네가 나와 내 나라로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으냐 네가 합당치 않은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의견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으로서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처럼 믿는 자가 잘못을 하게 되면 불신자들로부터 책망을 받는 수모를 겪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는 죄입니다. 아브라함의 잘못으로 아비멜렉의 온 나라와 백성들이 멸망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네가 어떤 생각으로 그런 일을 하였느냐?’고 책망을 했습니다.
11,12: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또 그는 실로 나의 이복누이로서 내 처가 되었음이니라.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동생이라고 말하여 아비멜렉이 그녀를 취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두 가지의 변명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이곳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자신을 죽일까 두려웠다는 것이며, 둘째는 실제로 사라가 자신의 이복누이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의 신앙이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한 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선지자’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해 주시지 않을까 거짓말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복누이라도 이미 자신의 아내가 되었기 때문에 누이라고 할지라도 아비멜렉에게 내어주어서는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연약하여 지게 되면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여 사람의 방편대로 행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떠난 심령은 세상적인 모든 악한 것들과 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아비멜렉의 세력이 두렵지 않기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거짓말을 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결코 바람직한 행위는 아닐 것입니다. 또한 거짓말보다 더 큰 잘못은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하려고 할 때에라도 사라가 자신의 아내라는 사실을 밝혀야 했다는 점입니다. 이 사실을 밝히지 않은 것은 사라를 아비멜렉에게 주어도 자신은 살아야 하겠다는 생명에 대한 애착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는 오히려 불신자보다 더 못한 행위였습니다.
13: 하나님이 나로 내 아비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여기에서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라고 아비멜렉에게 말한 근거가 나오고 있습니다. 서로 약속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라가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약속이야말로 이기주의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15: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노비를 취하여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너 보기에 좋은 대로 거하라 하고
아비멜렉이 우연히 아브라함의 거짓말을 알게 되었다면 아마도 그는 죽음을 면치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셔서 그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도록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또 두려운 마음으로 아브라함에게 호의를 베풀어 양과 소와 노비와 함께 사라를 돌려보내게 된 것입니다. 또한 자기 땅에서 어디든지 골라서 살라고 허락을 하였습니다.
16: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풀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선히 해결되었으니라.
아비멜렉은 하나님과 사라에게 사죄의 의미와 또 아브라함에게 화해의 표시로 은 천개를 주었습니다. 은 천개는 1,000세겔로 약 11.4kg이나 되는 정말로 많은 양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다시 자존심을 회복하고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배려이며, 사람들 앞에서 사라가 더럽힘을 당하지 않았다는 선포를 하는 것입니다.
17,18: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연고로 아비멜렉의 집 모든 태를 닫히셨음이더라.
사람의 방편과 수단으로 자신의 안위를 지키고자 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아내에게 수치를 주었으나,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선지자’의 직분을 감당하여 아비멜렉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브라함을 향한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해 주셔서 다시 생산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이로 볼 때에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하고도 동침할 수 없었던 것은 생식기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몸에서 난 자로 아브라함의 대를 잇게 하며, 구속사를 이끌어 갈 선민으로 삼으시려고 하는 약속을 지키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과 사라를 보호하시며,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에게는 그들의 위기를 통하여 오히려 더 좋은 계기로 변환시켜주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창세기 20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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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잇사 미솸 아브라함 알차 한네겝 와예쉡 베인 카데쉬 우베인 슈르 와야갈 비게랄
개역개정,1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새번역,1 아브라함은 마므레에서 네겝 지역으로 옮겨 가서, 가데스와 수르 사이에서 살았다. 아브라함은 그랄에 잠시 머문 적이 있는데,
우리말성경,1 아브라함이 거기에서 네게브로 이동해 가데스와 술 사이에 거주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랄로 가서 잠시 머물러 살았습니다.
가톨릭성경,1 아브라함은 그곳을 떠나 네겝 땅으로 옮겨 가서, 카데스와 수르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그라르에서 나그네살이하게 되었을 때,
영어NIV,1 Now Abraham moved on from there into the region of the Negev and lived between Kadesh and Shur. For a while he stayed in Gerar,
영어NASB,1 Now Abraham journeyed from there toward the land of the Negev, and settled between Kadesh and Shur; then he sojourned in Gerar.
영어MSG,1 Abraham traveled from there south to the Negev and settled down between Kadesh and Shur. While he was camping in Gerar,
영어NRSV,1 From there Abraham journeyed toward the region of the Negeb, and settled between Kadesh and Shur. While residing in Gerar as an alien,
헬라어구약Septuagint,1 και εκινησεν εκειθεν αβρααμ εις γην προς λιβα και ωκησεν ανα μεσον καδης και ανα μεσον σουρ και παρωκησεν εν γεραροις
라틴어Vulgate,1 profectus inde Abraham in terram australem habitavit inter Cades et Sur et peregrinatus est in Geraris
히브리어구약BHS,1 וַיִּסַּע מִשָּׁם אַבְרָהָם אַרְצָה הַנֶּגֶב וַיֵּשֶׁב בֵּין־קָדֵשׁ וּבֵין שׁוּר וַיָּגָר בִּגְרָר׃
성 경: [창20:1]
주제1: [아브라함과 그랄 왕 아비멜렉]
주제2: [아브라함의 불신앙적 행위]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 헤브론 지경 아므레 상수리 수풀(13:18)에서 장막을 걷고 남방(the south country), 곧 팔레스틴 남쪽 지방인 네게브(Negeb)로 이주한 것을 가리킨다. 이주 원인은 아마 그 무렵 헤브론 지역에 침입한 셋 족속(23장)으로부터 안전을 도모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랄 – 팔레스틴 남부, 사해 서쪽에 위치한 조그마한 성읍이다. 후일 이삭도 흉년을 피해 이곳으로 이주하였으며(26:1) 유다 왕 아사가 구스 군대를 크게 격파했던 곳이기도 하다(대하 14:13).
와요멜 아브라함 엘 사라 이쉬토 아호티 히 아이쉐라흐 아비멜렠 멜렠 게랄 와이카흐 엩 사라
개역개정,2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새번역,2 거기에서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라를 사람들에게 자기 누이라 소개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서, 사라를 데려갔다.
우리말성경,2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 사라에 대해서 “그녀는 내 여동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 사라를 데려갔습니다.
가톨릭성경,2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라르 임금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다.
영어NIV,2 and there Abraham said of his wife Sarah, “She is my sister.” Then Abimelech king of Gerar sent for Sarah and took her.
영어NASB,2 And Abraham said of Sarah his wife, “She is my sister.” So Abimelech king of Gerar sent and took Sarah.
영어MSG,2 Abraham said of his wife Sarah, “She’s my sister.” So Abimelech, king of Gerar, sent for Sarah and took her.
영어NRSV,2 Abraham said of his wife Sarah, “She is my sister.” And King Abimelech of Gerar sent and took Sarah.
헬라어구약Septuagint,2 ειπεν δε αβρααμ περι σαρρας της γυναικος αυτου οτι αδελφη μου εστιν εφοβηθη γαρ ειπειν οτι γυνη μου εστιν μηποτε αποκτεινωσιν αυτον οι ανδρες της πολεως δι’ αυτην απεστειλεν δε αβιμελεχ βασιλευς γεραρων και ελαβεν την σαρραν
라틴어Vulgate,2 dixitque de Sarra uxore sua soror mea est misit ergo Abimelech rex Gerarae et tulit eam
히브리어구약BHS,2 וַיֹּאמֶר אַבְרָהָם אֶל־שָׂרָה אִשְׁתֹּו אֲחֹתִי הִוא וַיִּשְׁלַח אֲבִימֶלֶךְ מֶלֶךְ גְּרָר וַיִּקַּח אֶת־שָׂרָה׃
성 경: [창20:2]
주제1: [아브라함과 그랄 왕 아비멜렉]
주제2: [아브라함의 불신앙적 행위]
누이라 하였으므로 – 이에 대하여 문서설(文書設, documentary hypothesi s))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12:10-20에 나오는 동일한 사건의 반복 기록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앞서의 사건은 아브라함 75세 때 애굽왕 바로와 관계된 일이었으나, 본장의 사건은 아브라함 99세 때 그랄 왕 아비멜렉과 관계된 일이기 때문이다. 아뭏든 이처럼 아브라함이 20여년 전에 저질렀던 것과 동일한 잘못을 또다시 범한 것은 (1) 그가 어떠한 이유에서든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면 반드시 시험에 빠지고 말았다는 점과 (2) 한번 지은 죄에 대하여선 쉽게 재범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교훈해 준다.
사라를 취하였더니 – 이러한 행위는 당시의 관습에 의해 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일국의 통치자는 어떤 처녀라도, 심지어는 그 땅의 일시적인 방문자 일지라도 마음에 들면 후궁으로 취할 수 있는 절대 권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여기서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한 이유는 90세가 다 된 사라의 미모에 반해서라기 보다 정략 결혼을 통해 자기 영토권내로 이주한 부유하고 강력한 족장 아브라함과 동맹 관계를 맺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Delitzsch).
와야보 엘로힘 엘 아비멜렠 바할롬 하라일라 와요멜 로 힌네카 메트 알 하잇솨 아쉘 라카흐타 웨히우 베울라트 바알
개역개정,3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새번역,3 그런데 그 날 밤에 하나님이 꿈에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네가 이 여자를 데려왔으니, 너는 곧 죽는다. 이 여자는 남편이 있는 여자다.”
우리말성경,3 그날 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의 꿈속에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제 네가 데려온 그 여자 때문에 죽게 될 것이다. 그녀는 남편이 있는 몸이다.”
가톨릭성경,3 그날 밤 꿈에, 하느님께서 아비멜렉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네가 데려온 여자 때문에 너는 죽을 것이다. 그 여자는 임자가 있는 몸이다.”
영어NIV,3 But God came to Abimelech in a dream one night and said to him, “You are as good as dead because of the woman you have taken; she is a married woman.”
영어NASB,3 But God came to Abimelech in a dream of the night, and said to him, ” Behold, you are a dead man because of the woman whom you have taken, for she is married. ”
영어MSG,3 But God came to Abimelech in a dream that night and told him, “You’re as good as dead–that woman you took, she’s a married woman.”
영어NRSV,3 But God came to Abimelech in a dream by night, and said to him, “You are about to die because of the woman whom you have taken; for she is a married woman.”
헬라어구약Septuagint,3 και εισηλθεν ο θεος προς αβιμελεχ εν υπνω την νυκτα και ειπεν ιδου συ αποθνησκεις περι της γυναικος ης ελαβες αυτη δε εστιν συνωκηκυια ανδρι
라틴어Vulgate,3 venit autem Deus ad Abimelech per somnium noctis et ait ei en morieris propter mulierem quam tulisti habet enim virum
히브리어구약BHS,3 וַיָּבֹא אֱלֹהִים אֶל־אֲבִימֶלֶךְ בַּחֲלֹום הַלָּיְלָה וַיֹּאמֶר לֹו הִנְּךָ מֵת עַל־הָאִשָּׁה אֲשֶׁר־לָקַחְתָּ וְהִוא בְּעֻלַת בָּעַל׃
성 경: [창20:3]
주제1: [아브라함과 그랄 왕 아비멜렉]
주제2: [아브라함의 불신앙적 행위]
현몽하시고 –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계시의 방편으로 꿈을 사용하신 경우이다. 물론 택한 백성을 위해서도 하나님께선 꿈으로 계시하셨지만(28:13-15;37:5-11;왕상 3:5;마 1:18-24), 이러한 일은 특히 이방인에게 자주 일어났는데(31:24;41:1-13;삿 7:13, 14;단 4:4-27;마 2:12), 이는 꿈이 하나님의 현현(theophany)보다는 차원이 낮은 계시의 방편임을 시사해 준다.
네가 죽으리니 – 비록 왕이라 할지라도 남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결혼 제도의 신성함을 부인하고 기본 인륜을 저버리는 행위이니 하나님의 진노를 면할 수 없었다. 이러한 정신은 고대 함무라비 법전에도 그대로 승계되었는데 거기에는 결혼한 여자를 범하였을 경우 쌍방 다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와아비멜렠 로 카랍 엘레하 와요말 아도나이 하고이 감 차디크 타하로그
개역개정,4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새번역,4 아비멜렉은, 아직 그 여인에게 가까이하지 않았으므로, 주님께 이렇게 아뢰었다. “주님, 주님께서 의로운 한 민족을 멸하시렵니까?
우리말성경,4 아비멜렉은 아직 그녀를 가까이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말했습니다. “내 주여, 주께서는 죄 없는 백성도 멸하시려 하십니까?
가톨릭성경,4 아비멜렉은 아직 그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으므로, 이렇게 아뢰었다. “주님, 당신께서는 죄 없는 백성도 죽이십니까?
영어NIV,4 Now Abimelech had not gone near her, so he said, “Lord, will you destroy an innocent nation?
영어NASB,4 Now Abimelech had not come near her; and he said, “Lord, will You slay a nation, even though blameless?
영어MSG,4 Now Abimelech had not yet slept with her, hadn’t so much as touched her. He said, “Master, would you kill an innocent man?
영어NRSV,4 Now Abimelech had not approached her; so he said, “Lord, will you destroy an innocent people?
헬라어구약Septuagint,4 αβιμελεχ δε ουχ ηψατο αυτης και ειπεν κυριε εθνος αγνοουν και δικαιον απολεις
라틴어Vulgate,4 Abimelech vero non tetigerat eam et ait Domine num gentem ignorantem et iustam interficies
히브리어구약BHS,4 וַאֲבִימֶלֶךְ לֹא קָרַב אֵלֶיהָ וַיֹּאמַר אֲדֹנָי הֲגֹוי גַּם־צַדִּיק תַּהֲרֹג׃
성 경: [창20:4]
주제1: [아브라함과 그랄 왕 아비멜렉]
주제2: [아브라함의 불신앙적 행위]
가까이 아니한 고로 – 하나님의 약속(17:19)에 근거한 비상 섭리의 결과이다. 만일 아비멜렉이 실제로 사라와 관계하였더라면 시기적으로 볼 때 사라가 낳은 아들 이삭(21:2, 3)은 블레셋 왕 아비멜렉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았을 것이다.
의로운 백성(*, 고이 차디크) – ‘백성’에 해당하는 ‘고이’는 대개 ‘이방 나라’,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직역하면 ‘죄없는 이방인’이란 뜻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아비멜렉과 그의 백성은 어느 정도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알고 있었으며 도덕적으로도 주변 성읍과는 달리 다소 나았던 것 같다. 이는 소돔과 고모라 멸망시 그들이 함께 심판당하지 않았던 점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19:24, 25). 아뭏튼 아비멜렉의 호소는 ‘구체적인 죄가 없는데도 벌주시려나이까’란 의미의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한 호소라 하겠다.
하로 후 아말 리 아호티 히 웨히 감 히 아메라 아히 후 베탐 레바비 우베니케욘 캎파이 아시티 조트
개역개정,5 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새번역,5 아브라함이 저에게, 이 여인은 자기 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이 여인도 아브라함을 오라버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깨끗한 마음으로 떳떳하게 이 일을 하였습니다.”
우리말성경,5 그가 제게 ‘그녀는 내 여동생’이라고 했고 그 여자도 역시 ‘그는 내 오빠’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 일을 했습니다.”
가톨릭성경,5 아브라함 자신이 저에게 ‘이 여자는 제 누이입니다.’ 하였고, 그 여자 또한 스스로 ‘그는 제 오라비입니다.’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흠 없는 마음과 결백한 손으로 이 일을 하였습니다.”
영어NIV,5 Did he not say to me, ‘She is my sister,’ and didn’t she also say, ‘He is my brother’? I have done this with a clear conscience and clean hands.”
영어NASB,5 “Did he not himself say to me, ‘She is my sister’? And she herself said, ‘He is my brother.’ In the integrity of my heart and the innocence of my hands I have done this.”
영어MSG,5 Didn’t he tell me, ‘She’s my sister’? And didn’t she herself say, ‘He’s my brother’? I had no idea I was doing anything wrong when I did this.”
영어NRSV,5 Did he not himself say to me, ‘She is my sister’? And she herself said, ‘He is my brother.’ I did this in the integrity of my heart and the innocence of my hands.”
헬라어구약Septuagint,5 ουκ αυτος μοι ειπεν αδελφη μου εστιν και αυτη μοι ειπεν αδελφος μου εστιν εν καθαρα καρδια και εν δικαιοσυνη χειρων εποιησα τουτο
라틴어Vulgate,5 nonne ipse dixit mihi soror mea est et ipsa ait frater meus est in simplicitate cordis mei et munditia manuum mearum feci hoc
히브리어구약BHS,5 הֲלֹא הוּא אָמַר־לִי אֲחֹתִי הִוא וְהִיא־גַם־הִוא אָמְרָה אָחִי הוּא בְּתָם־לְבָבִי וּבְנִקְיֹן כַּפַּי עָשִׂיתִי זֹאת׃
성 경: [창20:5]
주제1: [아브라함과 그랄 왕 아비멜렉]
주제2: [아브라함의 불신앙적 행위]
이는 내 누이라 – 아브라함의 이 말은 혈통 및 가계상(家系上)으로는 맞는 말(12절)이라 하더라도, 신앙 양심을 거스리고 세상 사람의 눈을 속이려 한 말이었다는 데 아브라함의 잘못이 있다.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 – 결혼하지 않은 여인을 후궁으로 취할 수 있는 당시대의 합법적인 왕의 권한을 뜻한다. 그 중 ‘온전한 마음’은 사라에 대한 내적 동기를 가리키며, ‘깨끗한 손’은 그녀를 자기 내실로 데려오도록 시도한 외적 행위를 가리킨다.
와요멜 엘라우 하엘로힘 바할롬 감 아노키 야다티 키 베탐 레봅카 아시타 조트 와에흐솤 감 아노키 오트카 메하토 리 알 켄 로 네타티카 린고아 엘레하
개역개정,6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새번역,6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나는, 네가 깨끗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잘 안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지켜서, 네가 나에게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 여인을 건드리지 못하게 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말성경,6 하나님께서 꿈속에서 또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역시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 일을 했다는 것을 안다. 네가 내게 죄짓지 않게 내가 너를 막은 것이다. 그 때문에 내가 너로 하여금 그녀를 건드리지 못하게 한 것이다.
가톨릭성경,6 그러자 하느님께서 꿈에 다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네가 흠 없는 마음으로 이 일을 한 줄 안다. 네가 나에게 죄를 짓지 않도록 막아 준 이가 바로 나다. 네가 그 여자를 건드리는 것을 내가 허락하지 않았다.
영어NIV,6 Then God said to him in the dream, “Yes, I know you did this with a clear conscience, and so I have kept you from sinning against me. That is why I did not let you touch her.
영어NASB,6 Then God said to him in the dream, “Yes, I know that in the integrity of your heart you have done this, and I also kept you from sinning against Me; therefore I did not let you touch her.
영어MSG,6 God said to him in the dream, “Yes, I know your intentions were pure, that’s why I kept you from sinning against me; I was the one who kept you from going to bed with her.
영어NRSV,6 Then God said to him in the dream, “Yes, I know that you did this in the integrity of your heart; furthermore it was I who kept you from sinning against me. Therefore I did not let you touch her.
헬라어구약Septuagint,6 ειπεν δε αυτω ο θεος καθ’ υπνον καγω εγνων οτι εν καθαρα καρδια εποιησας τουτο και εφεισαμην εγω σου του μη αμαρτειν σε εις εμε ενεκεν τουτου ουκ αφηκα σε αψασθαι αυτης
라틴어Vulgate,6 dixitque ad eum Deus et ego scio quod simplici corde feceris et ideo custodivi te ne peccares in me et non dimisi ut tangeres eam
히브리어구약BHS,6 וַיֹּאמֶר אֵלָיו הָאֱלֹהִים בַּחֲלֹם גַּם אָנֹכִי יָדַעְתִּי כִּי בְתָם־לְבָבְךָ עָשִׂיתָ זֹּאת וָאֶחְשֹׂךְ גַּם־אָנֹכִי אֹותְךָ מֵחֲטֹו־לִי עַל־כֵּן לֹא־נְתַתִּיךָ לִנְגֹּעַ אֵלֶיהָ׃
웨앝타 핫쉐브 에쉐트 하이쉬 키 나비 후 웨이트팔렐 바아드카 웨흐예 웨임 에네카 메쉽 다 키 모트 타무트 앝타 웨콜 아쉘 라크
개역개정,7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새번역,7 이제 그 여인을 남편에게로 돌려보내어라. 그의 남편은 예언자이므로, 너에게 탈이 나지 않게 하여 달라고 기도할 것이고, 너는 살 것이다. 그러나 그 여인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너에게 속한 사람들이 틀림없이 다 죽을 줄 알아라.”
우리말성경,7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주어라. 그는 예언자니 그가 너를 위해 기도해 주면 네가 살 것이다. 그러나 만약 네가 그녀를 돌려주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사람이 다 죽게 될 것이다.”
가톨릭성경,7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 사람은 예언자이니,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면 너는 살 것이다. 그러나 네가 만일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너에게 딸린 자들이 모두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을 알아 두어라.”
영어NIV,7 Now return the man’s wife, for he is a prophet, and he will pray for you and you will live. But if you do not return her, you may be sure that you and all yours will die.”
영어NASB,7 “Now therefore, restore the man’s wife, for he is a prophet, and he will pray for you, and you will live. But if you do not restore her, know that you shall surely die, you and all who are yours.”
영어MSG,7 So now give the man’s wife back to him. He’s a prophet and will pray for you–pray for your life. If you don’t give her back, know that it’s certain death both for you and everyone in your family.”
영어NRSV,7 Now then, return the man’s wife; for he is a prophet, and he will pray for you and you shall live. But if you do not restore her, know that you shall surely die, you and all that are yours.”
헬라어구약Septuagint,7 νυν δε αποδος την γυναικα τω ανθρωπω οτι προφητης εστιν και προσευξεται περι σου και ζηση ει δε μη αποδιδως γνωθι οτι αποθανη συ και παντα τα σα
라틴어Vulgate,7 nunc igitur redde uxorem viro suo quia propheta est et orabit pro te et vives si autem nolueris reddere scito quod morte morieris tu et omnia quae tua sunt
히브리어구약BHS,7 וְעַתָּה הָשֵׁב אֵשֶׁת־הָאִישׁ כִּי־נָבִיא הוּא וְיִתְפַּלֵּל בַּעַדְךָ וֶחְיֵה וְאִם־אֵינְךָ מֵשִׁיב דַּע כִּי־מֹות תָּמוּת אַתָּה וְכָל־אֲשֶׁר־לָךְ׃
성 경: [창20:6,7]
주제1: [아브라함과 그랄 왕 아비멜렉]
주제2: [아브라함의 불신앙적 행위]
아비멜렉의 행위는 그의 도덕 양심과 당시의 윤리 기준으로 볼 때에는 악이 아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신성한 섭리에 누(累)를 끼쳤기 때문에 선지자의 중재를 통해서만 죄 용서 받을 수 있었다.
선지자(*, 나비) – 원뜻은 ‘쉬임없이 말하다’로 신적 영감을 받아 말하는 ‘대언자'(출 7:1)를 가리킨다. 이런 자는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하는 일차적 사명 외에 하나님과 사람을 중재하는 역할도 맡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지자’로 칭하신 까닭은 하나님의 뜻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또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 아브라함이 선지자인 이상, 아비멜렉이 그의 아내를 취하려고 한 것은 선지자의 거룩성과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범죄 행위였다. 따라서 이러한 아비멜렉의 죄는 아브라함의 중재 기도를 통해서만 용서받을 수 있었다. 한편 이 같은 아브라함의 선지자적 기능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이미 소돔에 사는 조카 롯을 위한 중재 기도에서 발휘된 적이 있었다(19:29).
와야쉬켐 아비멜렠 바보켈 와이크라 레콜 아바다우 와예다벨 엩 콜 하데바림 하엘레 베아즈네헴 와이레우 하아나쉼 메오드
개역개정,8 아비멜렉이 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종들을 불러 그 모든 일을 말하여 들려 주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
새번역,8 다음날 아침에 아비멜렉은 일찍 일어나서, 신하들을 다 불렀다. 그들은 왕에게 일어난 일을 다 듣고서, 매우 두려워하였다.
우리말성경,8 다음날 아침 일찍 아비멜렉은 자기 신하들을 모두 소집해 그들에게 이 모든 일들을 다 말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가톨릭성경,8 아비멜렉은 아침 일찍 일어나 자기 종들을 모두 불러 모으고서, 그들에게 이 일을 낱낱이 들려주었다. 그러자 그 사람들은 크게 두려워하였다.
영어NIV,8 Early the next morning Abimelech summoned all his officials, and when he told them all that had happened, they were very much afraid.
영어NASB,8 So Abimelech arose early in the morning and called all his servants and told all these things in their hearing; and the men were greatly frightened.
영어MSG,8 Abimelech was up first thing in the morning. He called all his house servants together and told them the whole story. They were shocked.
영어NRSV,8 So Abimelech rose early in the morning, and called all his servants and told them all these things; and the men were very much afraid.
헬라어구약Septuagint,8 και ωρθρισεν αβιμελεχ το πρωι και εκαλεσεν παντας τους παιδας αυτου και ελαλησεν παντα τα ρηματα ταυτα εις τα ωτα αυτων εφοβηθησαν δε παντες οι ανθρωποι σφοδρα
라틴어Vulgate,8 statimque de nocte consurgens Abimelech vocavit omnes servos suos et locutus est universa verba haec in auribus eorum timueruntque omnes viri valde
히브리어구약BHS,8 וַיַּשְׁכֵּם אֲבִימֶלֶךְ בַּבֹּקֶר וַיִּקְרָא לְכָל־עֲבָדָיו וַיְדַבֵּר אֶת־כָּל־הַדְּבָרִים הָאֵלֶּה בְּאָזְנֵיהֶם וַיִּירְאוּ הָאֲנָשִׁים מְאֹד׃
성 경: [창20:8]
주제1: [아브라함과 그랄 왕 아비멜렉]
주제2: [아비멜렉의 책망]
모든 신복을 불러 –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 앞에, 그것도 아랫사람 앞에서 시인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아비멜렉은 자신의 잘못을 그들에게 고함으로 저들도 연대 책임을 느끼고 각성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도록 하였는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그의 겸허한 마음과 참된 용기가 잘 드러나 보인다.
와이크라 아비멜렠 레아브라함 와요멜 로 메 아시타 라누 우메 하타티 라크 키 헤베타 알라이 웨알 마므라케티 하타아 게돌라 마아심 아쉘 로 예아수 아시타 임마디
개역개정,9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새번역,9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불러들여서, 호통을 쳤다. “당신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소? 내가 당신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나와 내 나라가 이 크나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말이오? 당신은 나에게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거요.”
우리말성경,9 그리고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 말했습니다. “네가 우리에게 어찌 이럴 수 있느냐?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네가 나와 내 왕국에 이렇게 엄청난 죄를 불러들였느냐? 너는 내게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
가톨릭성경,9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불러 그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어째서이런 짓을 하였소? 내가 그대에게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대는 나와 내 왕국에 이렇게 큰 죄를 끌어들였소? 그대는 해서는 안 될 일을 나에게 저질렀소.”
영어NIV,9 Then Abimelech called Abraham in and said, “What have you done to us? How have I wronged you that you have brought such great guilt upon me and my kingdom? You have done things to me that should not be done.”
영어NASB,9 Then Abimelech called Abraham and said to him, “What have you done to us? And how have I sinned against you, that you have brought on me and on my kingdom a great sin? You have done to me things that ought not to be done.”
영어MSG,9 Then Abimelech called in Abraham and said, “What have you done to us? What have I ever done to you that you would bring on me and my kingdom this huge offense? What you’ve done to me ought never to have been done.”
영어NRSV,9 Then Abimelech called Abraham, and said to him, “What have you done to us? How have I sinned against you, that you have brought such great guilt on me and my kingdom? You have done things to me that ought not to be done.”
헬라어구약Septuagint,9 και εκαλεσεν αβιμελεχ τον αβρααμ και ειπεν αυτω τι τουτο εποιησας ημιν μη τι ημαρτομεν εις σε οτι επηγαγες επ’ εμε και επι την βασιλειαν μου αμαρτιαν μεγαλην εργον ο ουδεις ποιησει πεποιηκας μοι
라틴어Vulgate,9 vocavit autem Abimelech etiam Abraham et dixit ei quid fecisti nobis quid peccavimus in te quia induxisti super me et super regnum meum peccatum grande quae non debuisti facere fecisti nobis
히브리어구약BHS,9 וַיִּקְרָא אֲבִימֶלֶךְ לְאַבְרָהָם וַיֹּאמֶר לֹו מֶה־עָשִׂיתָ לָּנוּ וּמֶה־חָטָאתִי לָךְ כִּי־הֵבֵאתָ עָלַי וְעַל־מַמְלַכְתִּי חֲטָאָה גְדֹלָה מַעֲשִׂים אֲשֶׁר לֹא־יֵעָשׂוּ עָשִׂיתָ עִמָּדִי׃
성 경: [창20:9]
주제1: [아브라함과 그랄 왕 아비멜렉]
주제2: [아비멜렉의 책망]
합당치 않는 일 – 직역하면 ‘행해서는 안 될 일’. 즉 아브라함은 (1) 먼저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섭리와 손길을 불신하고 (2) 나아가 이웃을 실족케 하는, 행해서는 안 될 일을 범하였던 것이다.
와요멜 아비멜렠 엘 아브라함 마 라이타 키 아시타 엩 하다발 하제
개역개정,10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새번역,10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도대체 어째서 이런 일을 저지른단 말이오?”
우리말성경,10 그리고 아비멜렉은 다시 아브라함에게 말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이런 짓을 했느냐?”
가톨릭성경,10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다시 물었다. “그대는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일을 저질렀소?”
영어NIV,10 And Abimelech asked Abraham, “What was your reason for doing this?”
영어NASB,10 And Abimelech said to Abraham, “What have you encountered, that you have done this thing?”
영어MSG,10 Abimelech went on to Abraham, “Whatever were you thinking of when you did this thing?”
영어NRSV,10 And Abimelech said to Abraham, “What were you thinking of, that you did this thing?”
헬라어구약Septuagint,10 ειπεν δε αβιμελεχ τω αβρααμ τι ενιδων εποιησας τουτο
라틴어Vulgate,10 rursusque expostulans ait quid vidisti ut hoc faceres
히브리어구약BHS,10 וַיֹּאמֶר אֲבִימֶלֶךְ אֶל־אַבְרָהָם מָה רָאִיתָ כִּי עָשִׂיתָ אֶת־הַדָּבָר הַזֶּה׃
성 경: [창20:10]
주제1: [아브라함과 그랄 왕 아비멜렉]
주제2: [아비멜렉의 책망]
무슨 의견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한 정확한 의도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아비멜렉의 질책어린 물음이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에게 질책을 당하고 있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그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지 못하고 부끄러워 숨으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식이 잘못했을 때 그부모가 낯을 들 수 없듯 아브라함은 일찍이 부름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친구이며(대하 20:7) 대언자였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교회와 성도가 세상 사람로부터 이유 있는 조소와 질책을 당할 때 그것은 다시 한번 예수의 손에 못을 박는 행위가 됨을 명심해야 한다.
와요멜 아브라함 키 아말티 라크 엔 이르아트 엘로힘 밤마콤 하제 와하라구니 알 데발 이쉬티
개역개정,11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새번역,11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이 곳에서는 사람들이 아무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나의 아내를 빼앗으려고 할 때에는, 사람들이 나를 죽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말성경,11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저는‘이곳은 분명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내 아내 때문에 나를 죽일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가톨릭성경,11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이곳에는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이라고는 도무지 없어서, 사람들이 내 아내 때문에 나를 죽일 것이다.’ 하고 내가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영어NIV,11 Abraham replied, “I said to myself, ‘There is surely no fear of God in this place, and they will kill me because of my wife.’
영어NASB,11 And Abraham said, “Because I thought, surely there is no fear of God in this place; and they will kill me because of my wife.
영어MSG,11 Abraham said, “I just assumed that there was no fear of God in this place and that they’d kill me to get my wife.
영어NRSV,11 Abraham said, “I did it because I thought, There is no fear of God at all in this place, and they will kill me because of my wife.
헬라어구약Septuagint,11 ειπεν δε αβρααμ ειπα γαρ αρα ουκ εστιν θεοσεβεια εν τω τοπω τουτω εμε τε αποκτενουσιν ενεκεν της γυναικος μου
라틴어Vulgate,11 respondit Abraham cogitavi mecum dicens forsitan non est timor Dei in loco isto et interficient me propter uxorem meam
히브리어구약BHS,11 וַיֹּאמֶר אַבְרָהָם כִּי אָמַרְתִּי רַק אֵין־יִרְאַת אֱלֹהִים בַּמָּקֹום הַזֶּה וַהֲרָגוּנִי עַל־דְּבַר אִשְׁתִּי׃
성 경: [창20:11]
주제1: [아브라함과 그랄 왕 아비멜렉]
주제2: [아브라함의 변명]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 소돔, 고모라와 같은 여타 성읍처럼 이곳 거민들도 하나님을 경외치 않을 줄로 생각하고 두려워했다는 뜻이다. 물론 아브라함의 이러한 변명은 그랄 족속이 어느 정도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알고, 도덕적으로도 타성읍보다 다소 나았기는 하나 이들도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족속이었다는 점에서 그럴듯한 성격의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일전의 애굽사건(12:10-20)을 통하여 신변상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잘못된 생각과 잔꾀를 의지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경험하고서도 (1) 다시금 인간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혔으며 (2) 이를 타개하기위혜 재삼 사람을 기만하려 들었으니 큰 잘못일수 밖에 없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하려고만 하셨다면 아브라함의 이러한 잘못을 빌미로 그와 맺으셨던 언약(12:2, 3)을 파기할 수도 있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하지 않으시고 그 크신 사랑과 자비로 참고 또 참으시사 그 언약을 유지시켜 나가셨다. 따라서 이처럼 아브라함이 약속을 유업으로 받아 오늘날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결코 그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나의 나 된 것도 역시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다(고전 15:10). 그러니 우리는 무슨 일에서든지 자긍하지 말고 항상 겸손한 자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처신해야 할 것이다(롬 11:18-21).
웨감 아메나 아호티 바트 아비 히 아크 로 바트 임미 와테히 리 레잇솨
개역개정,12 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
새번역,12 그러나 사실을 말씀드리면, 나의 아내가 나의 누이라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아내는 나와는 어머니는 다르지만 아버지는 같은 이복 누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성경,12 그리고 사실 그녀는 제 여동생입니다. 제 어머니의 딸은 아니지만 제 아버지의 딸인데 제 아내가 된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2 더구나 그 여자는 정말 나의 누이입니다. 아버지는 같고 어머니가 달라서 내 아내가 되었습니다.
영어NIV,12 Besides, she really is my sister, the daughter of my father though not of my mother; and she became my wife.
영어NASB,12 “Besides, she actually is my sister, the daughter of my father, but not the daughter of my mother, and she became my wife;
영어MSG,12 Besides, the truth is that she is my half sister; she’s my father’s daughter but not my mother’s.
영어NRSV,12 Besides, she is indeed my sister, the daughter of my father but not the daughter of my mother; and she became my wife.
헬라어구약Septuagint,12 και γαρ αληθως αδελφη μου εστιν εκ πατρος αλλ’ ουκ εκ μητρος εγενηθη δε μοι εις γυναικα
라틴어Vulgate,12 alias autem et vere soror mea est filia patris mei et non filia matris meae et duxi eam uxorem
히브리어구약BHS,12 וְגַם־אָמְנָה אֲחֹתִי בַת־אָבִי הִוא אַךְ לֹא בַת־אִמִּי וַתְּהִי־לִי לְאִשָּׁה׃
성 경: [창20:12]
주제1: [아브라함과 그랄 왕 아비멜렉]
주제2: [아브라함의 변명]
실로 나의 이복 누이 – 이에 대하여 혹자는 사라가 이스가와 동일 인물(11:29)로 아브라함에게는 조카 딸이 될 뿐이지 이복 누이가 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Lange). 즉 사라가 아브라함을 가리켜 ‘내 오라비'(5절)라고 한 것은 단지 서로가 그에게 부르도록 약정했기 때문이지 결코 서로가 이복 오누이 관계였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뒷받침해 주는 성경적 근거가 없으며 또한 ‘실로'(*, 옴나)라는 단어 역시 불변사로 ‘분명히’, ‘확실히’, ‘참으로’라는 강조적 의미이기 때문에(수 7:20)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따라서 데라가 아브라함의 어머니 외에 또 어떤 여자를 취하여 사라를 낳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문자 그대로 사라는 아브라함의 이복 누이였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Keil).
내 처가 되었음이니라 – 이러한 근친 결혼은 (1) 인구가 미분산(未分散)되어 있고 (2) 가문의 혈통 보존을 중요시 여겼던 고대 사회에서는 도덕률과는 무관한 자연스런 관행이었을 것이다.
와예히 카아쉘 히트우 오티 엘로힘 미베트 아비 와오말 라흐 제 하스데크 아쉘 타아시 임마디 엘 콜 함마콤 아쉘 나보 솸마 이메리 리 아히 후
개역개정,13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새번역,13 하나님이 나를, 아버지 집에서 떠나서 여러 나라로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부탁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곳으로 가든지, 사람들이 나를 두고서 묻거든, 그대는 나를 오라버니라고 하시오. 이것이 그대가 나에게 베풀 수 있는 은혜요’ 하고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말성경,13 하나님께서 저를 제 아버지 집에서 떠나보내실 때 제가 그녀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내게 베풀어 줄 호의는 이것이오.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당신은 “그는 내 오빠”라고 해 주시오’라고 했습니다.”
가톨릭성경,13 하느님께서 내게 아버지 집을 떠나 떠돌아다니게 하셨을 때, 나는 그 여자에게 말하기를, ‘당신에게 당부하는데, 우리가 어느 곳으로 가든지 내가 당신의 오라비라고 말하시오.’ 하였습니다.”
영어NIV,13 And when God had me wander from my father’s household, I said to her, ‘This is how you can show your love to me: Everywhere we go, say of me, “He is my brother.” ‘”
영어NASB,13 and it came about, when God caused me to wander from my father’s house, that I said to her, ‘This is the kindness which you will show to me: everywhere we go, say of me, “He is my brother.”‘ ”
영어MSG,13 When God sent me out as a wanderer from my father’s home, I told her, ‘Do me a favor; wherever we go, tell people that I’m your brother.'”
영어NRSV,13 And when God caused me to wander from my father’s house, I said to her, ‘This is the kindness you must do me: at every place to which we come, say of me, He is my brother.'”
헬라어구약Septuagint,13 εγενετο δε ηνικα εξηγαγεν με ο θεος εκ του οικου του πατρος μου και ειπα αυτη ταυτην την δικαιοσυνην ποιησεις επ’ εμε εις παντα τοπον ου εαν εισελθωμεν εκει ειπον εμε οτι αδελφος μου εστιν
라틴어Vulgate,13 postquam autem eduxit me Deus de domo patris mei dixi ad eam hanc misericordiam facies mecum in omni loco ad quem ingrediemur dices quod frater tuus sim
히브리어구약BHS,13 וַיְהִי כַּאֲשֶׁר הִתְעוּ אֹתִי אֱלֹהִים מִבֵּית אָבִי וָאֹמַר לָהּ זֶה חַסְדֵּךְ אֲשֶׁר תַּעֲשִׂי עִמָּדִי אֶל כָּל־הַמָּקֹום אֲשֶׁר נָבֹוא שָׁמָּה אִמְרִי־לִי אָחִי הוּא׃
성 경: [창20:13]
주제1: [아브라함과 그랄 왕 아비멜렉]
주제2: [아브라함의 변명]
내 아비 집을 떠나…하실 때에 –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하나님께 소명(召命)을 받은 사실을 가리킨다(12:1). 이때 그는 이미 자신이 나그네와 같은 자로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게 될 운명에 처해 있음을 깨달았던 것 같다.
우리의 가는 곳마다 – 아브라함이 애굽에서도 사라를 가리켜 이복 누이라 칭한 것을 상기시켜 주는 말이다.(12:13). 아브라함 당시대의 고대 근동지방에서는 자신의 아내가 실제 누이가 아니라 할지라도 아내를 가리켜 누이라 칭하는 것이 관례적인 표현이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처신이 결코 거짓말을 위한 거짓말이거나 치졸한 변명만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이 순수한 마음에서 그렇게 처신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하여 이를 자구책(自救策)으로 이용하고자 했던데서부터 결국 모든 문제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은혜(*, 헤세) –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도리어 선으로 갚는 것과 같은 모든 자비, 연민, 사랑 등을 가리킨다. 이러한 은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죽음에 내어 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
와이카흐 아비멜렠 촌 우바카르 와아바딤 우쉐파호트 와이텐 레아브라함 와야쉡 로 엩 사라 이쉬토
개역개정,14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종들을 이끌어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의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새번역,14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양 떼와 소 떼와 남종과 여종을 선물로 주고, 아내 사라도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냈다.
우리말성경,14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양과 소와 남종들과 여종들을 주고 그의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주며
가톨릭성경,14 그러자 아비멜렉은 양과 소, 남종과 여종들을 데려다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의 아내 사라도 돌려주었다.
영어NIV,14 Then Abimelech brought sheep and cattle and male and female slaves and gave them to Abraham, and he returned Sarah his wife to him.
영어NASB,14 Abimelech then took sheep and oxen and male and female servants, and gave them to Abraham, and restored his wife Sarah to him.
영어MSG,14 Then Abimelech gave Sarah back to Abraham, and along with her sent sheep and cattle and servants, both male and female.
영어NRSV,14 Then Abimelech took sheep and oxen, and male and female slaves, and gave them to Abraham, and restored his wife Sarah to him.
헬라어구약Septuagint,14 ελαβεν δε αβιμελεχ χιλια διδραχμα προβατα και μοσχους και παιδας και παιδισκας και εδωκεν τω αβρααμ και απεδωκεν αυτω σαρραν την γυναικα αυτου
라틴어Vulgate,14 tulit igitur Abimelech oves et boves et servos et ancillas et dedit Abraham reddiditque illi Sarram uxorem suam
히브리어구약BHS,14 וַיִּקַּח אֲבִימֶלֶךְ צֹאן וּבָקָר וַעֲבָדִים וּשְׁפָחֹת וַיִּתֵּן לְאַבְרָהָם וַיָּשֶׁב לֹו אֵת שָׂרָה אִשְׁתֹּו׃
성 경: [창20:14]
주제1: [아브라함과 그랄 왕 아비멜렉]
주제2: [아비멜렉의 손해 배상]
양과 소와 노비…사라도 – 애굽 왕 바로처럼(12:16, 19) 아비멜렉도 사라 뿐 아니라 예물까지도 딸려 보낸 것은 기대 이상의 친절한 호의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지레 짐작한 모든 두려움, 불신(11절)등이 얼마나 그릇된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와요멜 아비멜렠 힌네 알치 레파네카 바토브 베에네카 쉡
개역개정,15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라 하고
새번역,15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나의 땅이 당신 앞에 있으니, 원하는 곳이 어디이든지, 가서, 거기에서 자리를 잡으시오.”
우리말성경,15 말했습니다. “보아라.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살고 싶은 데 가서 살도록 하여라.”
가톨릭성경,15 그러고 나서 아비멜렉이 말하였다. “보시오, 내 땅이 그대 앞에 펼쳐져 있으니 그대 마음에 드는 곳에 자리를 잡으시오.”
영어NIV,15 And Abimelech said, “My land is before you; live wherever you like.”
영어NASB,15 And Abimelech said, “Behold, my land is before you; settle wherever you please.”
영어MSG,15 He said, “My land is open to you; live wherever you wish.”
영어NRSV,15 Abimelech said, “My land is before you; settle where it pleases you.”
헬라어구약Septuagint,15 και ειπεν αβιμελεχ τω αβρααμ ιδου η γη μου εναντιον σου ου εαν σοι αρεσκη κατοικει
라틴어Vulgate,15 et ait terra coram vobis est ubicumque tibi placuerit habita
히브리어구약BHS,15 וַיֹּאמֶר אֲבִימֶלֶךְ הִנֵּה אַרְצִי לְפָנֶיךָ בַּטֹּוב בְּעֵינֶיךָ שֵׁב׃
성 경: [창20:15]
주제1: [아브라함과 그랄 왕 아비멜렉]
주제2: [아비멜렉의 손해 배상]
너 보기에 좋은 대로 거하라 – 아브라함을 자신의 영토내에서 내보내었던 바로(12:20)와는 대조되는 태도로 아브라함에 대한 아비멜렉의 우호적인 자세와 관대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호의에 의거해 이후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의 영토에서 우물을 파고 지낼 정도로 장기적인 체류를 하였다(21:25, 34).
우레사라 아말 힌네 나타티 엘레프 케셒 레아히크 힌네 후 라크 케수트 에나임 레콜 아쉘 잍타크 웨엩 콜 웨노카하트
개역개정,16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가리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해결되었느니라
새번역,16 그리고 사라에게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그대의 오라버니에게 은 천 세겔을 주었소. 이것은, 그대와 함께 있는 여러 사람에게서 그대가 받은 부끄러움을 조금이나마 덜어보려는 나의 성의의 표시요. 그대가 결백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될 것이오.”
우리말성경,16 그리고 아비멜렉은 사라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네 오빠에게 은 1,000개를 준다. 이것이 너와 함께한 모든 사람들 앞에서 네가 당한 일에 대한 보상이 될 것이다. 이 모든 일에서 네가 잘못이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가톨릭성경,16 그리고 사라에게 말하였다. “나는 그대의 오라버니에게 은전 천닢을 주었소. 보시오, 그것은 그대와 함께 있는 모든 이들 앞에서 그대의 명예를 회복시켜 줄 것이오. 이로써 그대는 모든 면에서 결백하다는 것이 입증되었소.”
영어NIV,16 To Sarah he said, “I am giving your brother a thousand shekels of silver. This is to cover the offense against you before all who are with you; you are completely vindicated.”
영어NASB,16 And to Sarah he said, “Behold, I have given your brother a thousand pieces of silver; behold, it is your vindication before all who are with you, and before all men you are cleared.”
영어MSG,16 And to Sarah he said, “I’ve given your brother a thousand pieces of silver–that clears you of even a shadow of suspicion before the eyes of the world. You’re vindicated.”
영어NRSV,16 To Sarah he said, “Look, I have given your brother a thousand pieces of silver; it is your exoneration before all who are with you; you are completely vindicated.”
헬라어구약Septuagint,16 τη δε σαρρα ειπεν ιδου δεδωκα χιλια διδραχμα τω αδελφω σου ταυτα εσται σοι εις τιμην του προσωπου σου και πασαις ταις μετα σου και παντα αληθευσον
라틴어Vulgate,16 Sarrae autem dixit ecce mille argenteos dedi fratri tuo hoc erit tibi in velamen oculorum ad omnes qui tecum sunt et quocumque perrexeris mementoque te deprehensam
히브리어구약BHS,16 וּלְשָׂרָה אָמַר הִנֵּה נָתַתִּי אֶלֶף כֶּסֶף לְאָחִיךְ הִנֵּה הוּא־לָךְ כְּסוּת עֵינַיִם לְכֹל אֲשֶׁר אִתָּךְ וְאֵת כֹּל וְנֹכָחַת׃
성 경: [창20:16]
주제1: [아브라함과 그랄 왕 아비멜렉]
주제2: [아비멜렉의 손해 배상]
은 천개 – 은 천 세겔을 가리킨다. 여기서 ‘세겔'(Shekel)은 히브리인들의 화폐 단위(대상 21:25)가 아닌 무게 단위(삼하 14:26)로 대략 11.4g(약 3돈)에 해당된다. 따라서 은 천 세겔은 11.4kg에 달하는 상당한 양이었음 알 수 있다. 이것은 아비멜렉이 사라를 아내로 취하려 했던 잘못에 대해 속죄하는 속전(贖錢)이자 동시에 아브라함과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화해의 선물이기도 하였다(신 22:28, 29).
네 수치틀 풀게 하였노니(*, 케수트 에나임) – ‘카사'(덮다, 가리다)와 ‘에나임'(눈)이 복합된 말로, 직역하면 ‘네 눈을 가리우게 하였으니’. 이는 곧 ‘네 눈에 베일을 씌워 보지 못하게 하였다’는 말로 사라의 순결성을 표현한 말인데 먼저 (1) 사라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범하려고 한 아비멜렉의 잘못을 보지 못하게 하였으니’란 뜻이며 (2)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베일로 가리운 것 같이 ‘사라를 우정의 눈으로 보지 못하게 하였으니’란 뜻이다(Calvin).
네 일이 다 선히 해결되었느니라 – ‘선히 해결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야카흐'(*)는 ‘증명하다’, ‘바로잡다’, ‘변론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본절은 ‘네가 모든 사람 앞에 결백하다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공동 번역)란 뜻으로 곧 사라의 순결성을 표현한 말임을 알 수 있다.
와이트팔렐 아브라함 엘 하엘로힘 와이르파 엘로힘 엩 아비멜렠 웨엩 이쉬토 웨암호타우 와예레두
개역개정,17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새번역,17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그의 여종들이 다시 아이를 가질 수 있도록 태를 열어 주셨다.
우리말성경,17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그의 여종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아이를 가질 수 있게 됐습니다.
가톨릭성경,17 이에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기도하자, 하느님께서는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그의 여종들의 병을 고쳐 주셨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되었다.
영어NIV,17 Then Abraham prayed to God, and God healed Abimelech, his wife and his slave girls so they could have children again,
영어NASB,17 And Abraham prayed to God; and God healed Abimelech and his wife and his maids, so that they bore children.
영어MSG,17 Then Abraham prayed to God and God healed Abimelech, his wife and his maidservants, and they started having babies again.
영어NRSV,17 Then Abraham prayed to God; and God healed Abimelech, and also healed his wife and female slaves so that they bore children.
헬라어구약Septuagint,17 προσηυξατο δε αβρααμ προς τον θεον και ιασατο ο θεος τον αβιμελεχ και την γυναικα αυτου και τας παιδισκας αυτου και ετεκον
라틴어Vulgate,17 orante autem Abraham sanavit Deus Abimelech et uxorem ancillasque eius et pepererunt
히브리어구약BHS,17 וַיִּתְפַּלֵּל אַבְרָהָם אֶל־הָאֱלֹהִים וַיִּרְפָּא אֱלֹהִים אֶת־אֲבִימֶלֶךְ וְאֶת־אִשְׁתֹּו וְאַמְהֹתָיו וַיֵּלֵדוּ׃
성 경: [창20:17]
주제1: [아브라함과 그랄 왕 아비멜렉]
주제2: [아브라함의 도고(禱告)]
아브라함이…기도하매 – 조금 전까지만해도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일로 인해 아비멜렉 앞에서 위신이 크게 실추되었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도움에 처해 순식간에 권위를 회복하는 장면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궁지에 몰린 아브라함이 선지자적 권위(7절)를 회복할 수 있도록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비멜렉 집안의 우환을 치료하여 주심으로 모든 사람이 아브라함을 우러러보도록 도와 주셨던 것이다(18절). 이처럼 오늘날 성도들도 자신이 잘나서가 결코 아니라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기 때문에 빛 된 사명을 다할 수 있는데,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께 일생 빚진 자임을 자각하고 더욱더 주어진 사명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고전 4:2).
여종 – 여기서는 단순한 하녀(maidservant)와는 구별되는 아비멜렉의 첩들을 의미하는 것 같다.
키 아초르 아차르 아도나이 베아드 콜 레헴 레베트 아비멜렠 알 데발 사라 에쉐트 아브라함
개역개정,18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음이더라
새번역,18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데려간 일로, 주님께서는 전에 아비멜렉 집안의 모든 여자의 태를 닫으셨었다.
우리말성경,18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때문에 아비멜렉 집안의 모든 태를 그동안 닫으셨던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8 주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때문에 아비멜렉 집안의 모든 태를 닫아 버리셨던 것이다.
영어NIV,18 for the LORD had closed up every womb in Abimelech’s household because of Abraham’s wife Sarah.
영어NASB,18 For the LORD had closed fast all the wombs of the household of Abimelech because of Sarah, Abraham’s wife.
영어MSG,18 For GOD had shut down every womb in Abimelech’s household on account of Sarah, Abraham’s wife.
영어NRSV,18 For the LORD had closed fast all the wombs of the house of Abimelech because of Sarah, Abraham’s wife.
헬라어구약Septuagint,18 οτι συγκλειων συνεκλεισεν κυριος εξωθεν πασαν μητραν εν τω οικω του αβιμελεχ ενεκεν σαρρας της γυναικος αβρααμ
라틴어Vulgate,18 concluserat enim Deus omnem vulvam domus Abimelech propter Sarram uxorem Abraham
히브리어구약BHS,18 כִּי־עָצֹר עָצַר יְהוָה בְּעַד כָּל־רֶחֶם לְבֵית אֲבִימֶלֶךְ עַל־דְּבַר שָׂרָה אֵשֶׁת אַבְרָהָם׃ ס
성 경: [창20:18]
주제1: [아브라함과 그랄 왕 아비멜렉]
주제2: [아브라함의 도고(禱告)]
태를 닫히셨음이더라 – 이처럼 하나님께서 아비멜렉 뿐 아니라 그와 관련된 전가족을 일시적으로 불임 상태로 만드신 것은 사라를 위한 이적적인 보호이자 또한 그녀를 통하여 탄생될 약속된 자녀(17:19)의 순결성 유지를 위한 특별한 보호 조처였다. 한편 여기서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헤 가운데 주신 언약은 인간의 실수나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 효력이 상실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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