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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풀어야 할 숙제. 가정, 부부, 형제, 자매, 식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은 어떤 모습일까요?
이동원 목사 명설교 다시보기 ‘에베소에 전해진 가정복음’
CBSTV 다시 보는 명설교 더울림 The Impressive 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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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달 설교6편 – 다음블로그
요셉의 효행을 본받읍시다 (창 50:1-9)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아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서둔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 …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8/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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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 한국성결신문
가정의 달 설교는 삼사대가 한가족을 이루는 전통적인 가족으로부터 갓난 아기를 두고 있는 신혼부부 가정, 자녀를 출가시키고 둘만 남은 노부부 가족 …
Source: www.kehcnews.co.kr
Date Published: 8/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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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별 설교 – mission – 가정의 든든한 기초 (행 10:1-8)
오늘은 원래 ‘성결교회 주일’이지만, 저는 특별히 ‘가정 주일’로 지키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정의 달 5월을 어린이 주일과 어버이 주일 등으로 잘게 나누다 …
Source: mission.bz
Date Published: 7/25/2021
View: 6693
5월 가정의 달을 맞이 하면서 | 뉴욕어린양교회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마음 속에 가정에 대한 …
Source: nylfc.org
Date Published: 8/9/2022
View: 5822
설교와 칼럼 – 5월, 가정의 달 – 한밭교회
2022년 5월 1일자 목회서신 / 곽창대 목사 “5월, 가정의 달” 5월에는 가정과 관련된 기념일이 많습니다. 어린이날(5일), 어버이날(8일), 입양의 날(11 …
Source: www.hanbat.or.kr
Date Published: 11/1/2021
View: 3441
[가정의달 설교, 창2:20] 창조질서로서의 가정 _ 유경재 목사
창조질서로서의 가정 창 세 기 2:20-25, 골로새서 3:18-25 설교 : 유경재 목사 가정의 달인 5월 마지막 주일에 다시 한 번 성경 특히 창세기에 나타난 …
Source: koinedata.tistory.com
Date Published: 10/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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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일의 설교] 행복한 가정(시 128:1~6) – 기독신문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통해 안식과 평안, 행복을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오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달력을 보게 되면 가족과 연관된 날들이 많이 있음을 보게 …
Source: www.kidok.com
Date Published: 2/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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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11일 새벽설교: 가정의 달 (화목) 잠언 – 17:1-22
가정의 달 (화목). 잠언 17:1-22.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왜 5월이 가정이 달이냐면 5월에 어버이날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Source: lastingforever.tistory.com
Date Published: 9/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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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 설교 41편 – 네이버 블로그
가정의 달 설교 41편 … 가정은_하나님이_허락하시는_복된_낙원.hwp. 가정의_복을_받읍시다.hwp … 기독교인_가정의_필수_3요소.hwp.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0/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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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가정 의 달 설교
- Author: CBS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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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9.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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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지구촌 교회
요셉의 효행을 본받읍시다
( 창 50:1-9 )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아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서둔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 창 50:5 )
부모를 잘 공경하고 효도하라는 것은 어떤 인간의 철학이나 사상을 넘어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십계명 중에 제 5계명에서 제 10계명에 이르는 인륜 계명의 제일로 효를 말씀하신 이유는 이 효가 바로 모든 인간 세상의 윤리와 도덕의 근본이 되고 시작이 되기 때문이며, 가정과 사회질서의 기본이 되고 출발이 되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잘 공경하는 사람이라면 도둑질이나 살인죄를 범할 수가 없고 좋은 시민, 좋은 회사원이 안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세의 징조 중의 하나가 부모를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회가 어지러워지는 것입니다. 딤후 3:1-3 에서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라고 했듯이 부모를 거역하는 세상이 되는 것이 말세의 징조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그런 세상입니다.
고로 오늘날 부모를 거역하는 세대 속에서 사는 우리 성도들은 더욱 힘써 효를 행해야 합니다. 효를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모범적인 효자 한 사람을 찾아볼 수가 있으니,그가 바로 창세기에 나타난 야곱의 아들 요셉입니다. 이에 오늘 우리는 어버이 날을 맞아 이 요셉의 효행을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요셉은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렸습니다
야곱은 12 아들 중에 요셉을 제일 예뻐하고 사랑해서 채색옷을 특별히 지어 입혔습니다. 요셉이 이런 특별한 사랑을 받은 것은 그만큼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해 드렸고 마음에 들게 행동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뭐니뭐니해도 부모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고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 첫째 효도이지, 비단 옷에 육선이 상에 가득하게 해 드려도 마음이 즐겁게 못해 드리면 효도가 되지 못합니다.
중앙청 뒤에 효자동이 있는데, 그 동네가 ‘효자동’ 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어느 집에서 시아버지가 주무시던 이불 밑에서 두고 나간 어린 아이가 깔려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며느리가 일 나갔다가 들어와 보니 아이는 막 숨이 넘어갔는데, 이를 본 아이 엄마가 얼른 아이를 업고 남편한테로 달려갔습니다. 시아버지가 아시면 걱정하실까봐 얼른 몰래 업고 나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남편은 죽은 아들을 보고 할아버지의 마음을 상케 한 불효자식이라고 뺨을 냅다 한 대 쳤답니다. 그랬더니 글세, 그 뺨을 맞은 죽었던 아이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하여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 소문이 널리 퍼져서 그 동네를 효자동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부모를 즐겁게 해 드리기는 커녕 도리어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해 드리지는 않습니까? 잠 15:20 에 보면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 하였고, 잠 23:25 에도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고 하였습니다.
2. 부모에게 순종했습니다
어린 소년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형들에게 점심을 갖다 주며 잘 있는가 보고 오라고 할 때, 살기등등한 형들의 마음을 모를 리가 없었겠으나,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 머나먼 길을 찾아갔습니다. 세겜에 가서 형들이 이동했으면 핑계대고 그냥 돌아올 수도 있었겠지만 도단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 또 그 멀고 먼 길을 굳이 찾아갔습니다. 결국 거기서 요셉은 형들에게 죽을 뻔하게 되고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또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선조들과 같이 장사지내 달라’ 고 명령하셨는데, 그에 순종하여 1,000리(400km) 가 넘는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아버지를 장사지냈습니다. 그 옛날, 버스도 택시도 없는 시절에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마는 요셉은 아버님이 돌아가신 다음에도 명령대로 순종했습니다. 이런 효자이기 때문에 다른 형제들보다 더 큰 축복을 받고 대애굽의 총리대신까지 되었습니다.
엡 6:1 에 보면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 ‘옳으니라’ 는 말은 ‘당연하다’ (It is right…) 는 뜻입니다. 결국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자녀들의 마땅한 도리요 의무인 것입니다.
옛날 순 임금의 아버지 고수는 후처의 꾀임에 빠져서 아들을 몹시 괴롭혔다고 합니다. 한 번은 이복동생 상이 물에 빠져 죽게 된 것을 보고 순이 들어가서 건져주었는데도, 계모는 그것을 순이 계획적으로 한 짓이라고 해서 피가 나도록 때렸다고 합니다. 그래도 순은 지극한 효성을 다했습니다. 한 번은 계모가 물이 없는 우물에 비녀를 빠뜨리고 순을 보고 들어가 건져오라고 들여보내 놓고는, 남편 보고는 물이 없는 샘을 그대로 두면 빠지기 쉽고 위험하니 메워버리라고 해서 순이 들어간 우물에 돌과 흙을 퍼부었습니다. 다행히 우물 안에는 옆으로 굴이 있어서 순은 그곳으로 빠져 나와 살았다고 합니다. 한 번은 계모가 순에게 썩은 곡식을 옮기라고 다락에 올라가게 해 놓고는 불을 질렀습니다. 마침 옆에 삿갓 두 개가 있어서 순은 그것을 양 겨드랑이에 끼고 뛰어내려서 살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못된 부모이지만 순은 끝내 효도를 잘 해서 그 소문이 요 임금에게까지 들어가 요 임금이 순을 데려다 키워서 왕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효자 순은 역시 훌륭한 임금이 되어 천추에 빛나는 임금이 되었습니다. 마치 효자 요셉이 대애굽의 지혜로운 총리대신이 된 것과 같습니다.
가정은 하나님이 만드신 최초의 거룩한 조직(Divine institution) 입니다. 가정이 부패하면 국가도 부패하고 교회도 부패합니다. 그런데 이 가정의 부패는 부모와 자식간에 올바른 관계가 되지 못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부모는 신적 권위(Divine authority) 를 가진 분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일이 아닐진대 자녀들은 부모에게 반드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도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되신 분이지만 육신의 부모에게 순종하고 효도했습니다. 눅 2:51 에 보면 “예수께서 한 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3. 물질로 봉양했습니다
창 47:12 에 “그 아비와 형제들과 아비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식물을 주어 공궤하였더라” 고 한 말씀대로, 요셉은 굶어 돌아가시게 된 부모님을 모셔다가 잘 봉양했고, 뿐만 아니라 부모님이 낳으신 자식들,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형들과 그 자식들을 잘 살게 해 주었습니다.
사실 자기가 쓰는 용돈의 5분의 1만 드려도 효자가 아니겠는가, 자기가 옷을 다섯 번 해 입을 때 한 벌만이라도 해 드리면 불효자는 아니지 않겠나 생각됩니다. 자식들은 부모님께 서슴없이 돈을 달라고 하지만, 부모님은 당신이 낳고, 키우고,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켰건만 용돈 달라는 말이 잘 안 나온다고 합니다. 알아서 옷 한 벌, 용돈 한 푼이라도 아쉽지 않게 해 드리도록 다시 다짐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밥을 먹여 키웠으면 부모가 늙고 불편하실 때 먹여드리는 것이 당연하고, 옷 입지 못할 때 옷 입혀 키웠으면 거동 못 하시는 부모님 옷 입혀 드리는 것도 당연하고, 부모님이 대소변 가려서 자식 키워주셨으니, 부모님도 그렇게 모시는 것이 당연하데 자식들은 왜 그렇지 못합니까?
딤전 5:8 에 보면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고 했는데, 하물며 부모님을 돌보지 않고 봉양치 않는 사람이야 얼마나 죄가 크겠습니까?
옛날에는 고려장이라고 해서 늙은 부모님을 산 채로 산에 갔다 버렸다고,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 고 하지만, 늙으신 부모님 기도원에나 양로원에 데려다 놓고 몇 년씩 돌보지 않고 찾아보지 않는 것은 고려장과 무엇이 다를 것이 있습니까? 돌아가신 후에 후회말고 잘 봉양합시다. ‘심는대로 거두는 법칙’ 은 부모님께 심는대로 후손들을 통해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님 돌아가신 다음에도 70일장을 지냈고, 시신의 부패를 막기 위해 향 재료를 넣는데도 40일이 걸렸으니, 얼마나 많은 비용과 정성이 들었겠습니까? 참으로 상상도 못할 효성을 보였습니다.
4. 부모님께 영예를 돌렸습니다
요셉은 종살이, 감옥살이 별별 고생 다 하면서도 성공하고 축복받아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부친을 잘 모셨으니 얼마나 부모님께 영예를 돌리고 기쁨을 드렸겠습니까?
으리으리한 황금 수레를 보내 아버님을 모시고 왔으며, 휘황찬란한 옷을 입은 요셉이지만 맨발로 뛰어나가 맞아 드리고 목을 부둥켜 안고 엉엉 울 때의 광경을 생각해 보십시오. 또 돌아가신 뒤에도 70일장을 지내고 1,000리가 넘는 가나안 땅으로 장례 행렬이 지날 때 얼마나 굉장했겠습니까? 부모님께 큰 영예가 돌아가게 했던 것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는 말씀에서 ‘공경’ 이라는 말은 곧 ‘무겁다’ 는 뜻입니다. 부모님을 가볍게 대하지 않고 무겁게 대하라는 뜻입니다. 부모에게 욕을 돌리는 자식이 되지 말고 크나큰 영예를 돌리는 자식이 됩시다.
5. 형제 사랑으로 효도했습니다
요셉은 자기를 죽이려던 형들이었지만, 부모님이 낳은 자식으로서 그 형들과 형들의 자식들까지 사랑으로 돌보고 키웠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장례식이 끝나자 전에 요셉을 죽이려 했던 형들이 이제라도 요셉이 복수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말하기를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르기를 너희는 요셉에게 이같이 이르라. 네 형제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였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라고 말하자, 요셉이 그 말을 듣고 울었더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아버지 체면 때문에 자신들을 돌보아 주었으나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복수하지나 않을까’ 두려워 떠는 것을 보고 울었던 것입니다. 이때 요셉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간곡한 말로 위로했다고 했습니다.
이제라도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서 못 사는 형제 자매를 돌봐 주시고, 형제간에 화목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부모의 마음에는 모든 자식이 다 안쓰럽고 염려가 되므로 진정한 효자라면 이러한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형제를 사랑으로 보살핌으로써 효를 다해야 합니다. 부모는 형제간에 우애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가장 기뻐하고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부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최대로 공경하고 기쁘게 해 드림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는 효자, 효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
( 삼하 18:9-15 , 삼하 24:24-33 )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삼하 18:33 )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가정은 세상에서도 사회의 기본 단위로서 중요시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공동체입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복된 것으로서, 하늘 나라의 모형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부모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과 비슷해서 그 그림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난 다윗 왕이 그 아들 압살롬을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다윗 왕은 가장 사랑하고 잘 생긴 아들 압살롬의 쿠데타로 궁궐에서 쫓겨나 허둥지둥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밤새도록 피난을 해서 요단을 건너 마하나님에 이르렀을 때, 압살롬은 많은 군대를 이끌고 자기 부친 다윗 왕과 그 부하들을 진멸하려고 쳐들어 왔습니다. 이 때에 다윗 왕의 부하 요압 장군과 아비새 장군과 잇대 장군 등 몇몇 장수들이 적은 군사를 거느리고 싸우러 나갔습니다.
그때에 다윗 왕은 부하 장군들에게 ‘꼭 승전하고 돌아오라’ 는 당부는 하지 않고, 자신을 죽이려 하는 그 아들 압살롬을 위해서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 고 신신 부탁을 했습니다. 패역무도한 자식이건만, 그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부디 죽이지 말고 너그럽게 대접하라’ 고 한 것입니다.
마침내 에브라임 수풀에서 접전이 벌어져 싸우던 중 압살롬이 노새를 타고 숲 속을 달리다가 큰 상수리 나무 가지에 그의 머리털이 걸려서 대롱대롱 매달리고 노새는 빠져나갔습니다. 이때, 한 군사가 요압 장군에게 이 사실을 고하였더니 ‘네가 그걸 보고 어찌하여 당장에 쳐서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느냐 그리 했었다면 은 열 개와 띠 한 개를 주었으리라’ 했더니, 그 군사가 하는 말이 ‘은 천 개를 준다해도 왕의 아들을 죽일 수 없나이다’ 고 했습니다. 그러자 요압 장군이 군사를 데리고 가서 작은 창 세 개를 압살롬의 가슴에 꽂고 부하 열명이 달려들어 쳐 죽였습니다.
이때 다윗 왕은 두 문 사이에 앉아서 초조하게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승전의 소식보다도 그 아들 압살롬의 생사 여부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올 때마다 ‘압살롬이 어찌 되었느냐?’ 고 물으면서 혹시 그 아들이 죽었을까봐 걱정했습니다.
마침 아히마하스란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 오는 것을 보고 ‘내 아들 압살롬이 잘 있느냐?’ 고 물었을 때, 왕의 그러한 심중을 헤아린 아히마하스가 엎드려 절하면서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붙여 주셨나이다’,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라고 지혜롭게 대답했습니다. 그 다음 구스 사람이 달려 왔을 때도 ‘내 아들 압살롬이 잘 있느냐?’ 고 물었는데, 이에 대해 구스 사람이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소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보고했더니, 다윗은 그 소식을 듣고 너무 너무 마음이 아파서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압살롬 내 아들, 내 아들아’ 라고 하며 슬피 울었습니다.
얼마나 그칠줄 모르고 슬피 울었던지 요압 장군이 들어가서 ‘왕과 왕의 자녀와 왕의 처첩들의 생명을 구원한 신복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십니까?… 이제 봤더니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 하였나이다. 빨리 일어나서 왕의 신복들을 위로하시지 않으면 왕의 평생에 없었던 큰 화를 당하실 것입니다’ 라고 위협적인 말을 했습니다. 그제서야 다윗 왕은 성문에 올라 앉아 백성을 위로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부모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과 흡사한 점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자신을 반역한 아들 압살롬에 대한 다윗의 사랑을 통하여 반역하고 대적하는 인간을 사랑하시고, 목숨을 버리시키까지 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반역하는 자들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과연 어떤 사랑입니까?
1. 찾으시는 사랑
다윗은 그 불효막심하고 못된 자식이지만, 제발 죽지 않고 돌아오기만 간절히 소원하여 싸움터에 나가는 장군들에게 신신 당부하기를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 고 간곡히 말하고, 문에 앉아서 그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자신의 왕위를 빼앗고 자기를 죽이기까지 하려는 그 패역무도한 자식이건만 죽지 않고 살아 오기만을 학수고대하며 찾고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잃은 자, 아버지로부터 멀리 떠난 죄인들을 애타게 찾고 계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찾고 계시는 모습을 세가지 비유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세상에 찾아오시는 것을 의미하며, 그 다음은, 여인이 잃은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 등불을 켜 들고 온 방안을 쓸며 찾는 비유인데 이는 성령께서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시는 역사를 의미하는 것이며, 마지막, 탕자의 비유는 성부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시는 놀라운 사랑의 비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패역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멀리 떠났으나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찾고 계십니다.
2. 용서하는 사랑
다윗은 자기(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으려는 그 패역무도한 아들이지만, 용서하는 사랑으로 그 아들이 죽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두 문 사이에서 안절부절하며 앉아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란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어떤 부잣집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나가 얼마 안가서 다 탕진해 버렸습니다. 이제는 더 살 수가 없어서 집에 돌아가고 싶은데, 도무지 아버지가 자기 같은 못된 자식을 용서하고 받아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눈물의 편지를 써서 보내기를 ‘만일 이 못된 자식을 용서하시고 받아주신다면 아무날 아무시에 기차를 타고 우리 동네 앞을 지날 터인데, 내가 지나면서 볼 수 있도록 마당에 있는 대추나무에 흰 손수건 하나를 걸어 주십시오. 그러면 다음 정거장에 내려서 들어 가겠습니다.’ 라고 써서 보냈습니다. 마침내 그 날이 돌아와서 기차에 몸을 싣고 무거운 마음으로 고향을 향해 갑니다. 점점 자기 집 동네가 가까울수록 이 아들은 초조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목을 길게 내밀고 자기 동네를 바라 보니, 대추나무 뿐만 아니라 앵두나무 할 것 없이 나무마다 가지마다 흰 손수건, 흰 보자기, 흰 홑이불, 이불 호청까지 전부 하얗게 눈과 같이 덮여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부모는 혹시나 아들이 잘못 보고 지나칠까봐, 흰것이란 흰 것은 있는 대로 다 내다가 나무에다 걸어 놓았던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와 같이 용서하시는 사랑으로 지금도 잃어버린 영혼들이 돌아와 구원받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찬송가 317장의 가사를 되새겨 보십시오.
‘어서 돌아 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
주 어찌 못 감당하고 못 받으시리오
우리 주의 넓은 가슴은 하늘보다 넓고 넓어’
또한 사 1:18 에서는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실 때에도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기도하셨고, 한 강도는 죽는 순간에 회개하며 예수님을 믿을 때에 예수께서는 그를 용서하사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3. 목숨을 버리는 사랑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고 슬피 울었습니다. 그 패역무도한 아들이건만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좋을 뻔 했다’ 고 자기 목숨까지 주고라도 아들의 생명을 살리기 원하는 부모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식들이 홍역을 하거나, 몹시 아파서 괴로워 할 때는 대신 아파주고 싶은 마음, 생명을 대신해서라도 살리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나의 죄를 위해서 대신하여 피를 흘려 주시고 죽어 주신 것은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인한 것입니다. 이제는 어떤 흉악한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예수님만 믿으면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으로 인해 다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요 3:16 ) 고 말씀했습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예수님만 믿으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그 죄를 대신 갚아주사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치 마시기 바랍니다. “영접하는 자, 곧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약속했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기로 결심하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어버이 날을 하루 앞둔 오늘 다시금 한없는 부모님의 사랑을 깨달으며, 동시에 더 크고 넓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최고입니다.
( 고전 13:1-13 )
내가 네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 고전 13:3 )
훈훈하게 불어오는 봄바람이나 화사하게 펴서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는 꽃들은 오월이 계절의 여왕이라는 말을 실감나게 해줍니다. 이처럼 화창한 날씨와 만발하게 핀 온갖 꽃들이 오월을 아름답게 하듯이 우리의 생애를 가장 빛나고 아름답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랑일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은 ‘사랑은 최고입니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본문의 마지막 절에 보면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 하였습니다. 고로 우리 성도들은 이 사랑을 가장 귀히 여기고 사랑을 이루고 실천하는 일을 최고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곧 사랑으로서,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요일 4:7 ).
이에 오늘 우리는 우리가 최고의 것으로 여겨야 할 사랑이 과연 어떤 면에서 최고인지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사랑을 가장 귀히 여기고 열심히 실천하는 일에 힘쓰고자 합니다.
1. 사랑은 최고의 능력입니다
참된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진정한 사랑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빅톨 위고의 유명한 소설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장발장의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많은 죄를 범해 감옥에도 여러 번 갔다 왔으나 마음은 변화되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어느날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하고 어느 교회의 성직자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그 집의 은촛대를 보고는 그의 결심이 깨졌습니다. 그는 그 은촛대를 훔쳐 가지고 나왔습니다. 몰래 도망하려다 경찰한테 붙잡혀 그 성직자 앞에 끌려 왔을 때 성직자는 말하기를 ‘저쪽 것도 주었는데 어찌 하나만 가져 갔는고’ 라고 하여 장발장은 마음에 큰 감동을 받고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마음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을 베푸는 길 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계속된 선지자의 외침과 징계에도 불구하고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완악한 인간들을 위해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어 피흘려 죽게 하신 사랑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기만 하면 용서해 주시고 영생을 주신다고 하는 그 사랑을 보여 주셨을 때 마침내 인간들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서 목숨까지라도 버리겠다고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제일 큰 능력입니다.
아이들도 완력만 가지고 기르려면 잘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무슨 실수나 허물이 있을지라도 사랑으로 감싸주고 용서해 줄 때에 마음이 감동될 줄로 믿습니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주 싸우게 되는 것은 서로 사랑으로 대해 주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서로가 완력, 폭력을 버리고 사랑으로 대해 주기를 축원합니다.
사랑밖에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가 없고 가정도 변화시킬 수 없기에, 우리는 교회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랑의 운동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임을 믿으시고 성령을 내 마음속에 모셔야 되는 것임을 명심합시다.
2. 사랑은 최고의 덕입니다
갈 5:14 에 보면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말씀에 이루었나니” 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수많은 계명이 있지만 그것을 줄이면 10계명이 되고 이것을 다시 둘로 나누면 위로 하나님 사랑하고 아래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이 됩니다. 이것을 다시 하나로 줄이면 바로 사랑입니다. 고로 사랑은 성도들이 갖추고 이루어야 할 최고의 덕목인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은 살인을 할 수 없고 이웃을 해칠 수도 없고 거짓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드러몬 헨리(D. Henry) 라고 하는 사람은 “세계 최대의 것은 사랑이다” 라고 말했고 골 3:14 엔 “사랑은 온전케 매는 띠니라” 라고 했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 13장은 말씀하기를 “천사의 말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유익이 없고 모든 비밀을 아는 지식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비록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아무 것도 아니라” 고 했습니다. 또 불쌍한 사람을 구제하고 순교를 해도 그 속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없다고 말씀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 했습니다. 최고의 덕은 사랑인 것입니다.
여러분! 최고의 덕인 사랑을 지닌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3. 사랑은 최고의 은사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은사에 대해 나옵니다.성령은 같지만 그 은사는 서로 다른데 지혜의 은사, 지식, 믿음, 병고침, 능력, 예언, 방언, 통역, 영분별 등 여러 가지 은사가 나타납니다. 그 은사에 대해 결론적으로 말씀하시길(31절)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제일 좋은 길을 보이겠다고 말씀하시며 12장을 끝맺고 13장에 와서 사랑에 대한 말씀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제일 큰 은사요 가장 좋은 길임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즉 은사란 ‘거저 주어진 선물’ 이라는 뜻으로서, 이는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복된 것들을 말합니다. 고로 은사란 성도들이 성령 충만한 가운데서 간절히 사모하고 누려야 하는 축복들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러한 것들 중의 최고가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나이가 굉장히 많이 들었을 때 설교를 하라고 하면 10번이고 20번이고 ‘성도들이여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누군가 ‘왜 선생님은 그렇게 똑같은 소리만 하십니까?’ 하고 물을 때에 ‘사랑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하면서 설교할 때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을 이야기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가장 귀하고 복된 것이기 때문이지요. 실로 여러분들 모두 이러한 가장 귀한 축복인 사랑의 은사를 소유하시길 축원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내가 수양하고 노력한다고 해서 이러한 사랑을 소유하고 행할 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을 받아야만 사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곧 사랑 충만인 것입니다.
로마서 5:5에 의하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우리의 마음이 결심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와야 되는 줄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마치 달빛은 햇빛을 받아 반사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와야만 우리 또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같이 여러분들 하나 하나의 가지가 예수님께 붙어서 사랑의 진액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옮겨와 진정한 사랑의 열매를 맺으시길 축원합니다.
원만한 부부관계가 되려면?
( 엡 5:21-33 )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엡 5:33 )
옛날에 어떤 부인이 여러 해 동안 병환으로 누워있는 남편을 간호하며 뒷바라지를 하다 못해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마지막으로 밥이나 한 상 잘 지어주고 나서 버리고 도망가려고 했습니다. 양심에 괴로움을 느끼며 우물가에서 쌀을 씻고 있는데 도마뱀 한 마리가 떨어진 쌀 알을 물고 시궁창 다리 밑으로 들어 갔다가는 또 나와서 물고 들어가고, 또 나와서는 물고 들어가곤 해서 쌀 씻다 말고 다리 밑을 보았더니 도마뱀 숫놈이 꼬리가 나무에 눌린 채 언제부터인지 도망을 못 가고 있는데, 그 암놈의 도마뱀이 숫놈의 도마뱀에게 양식을 물어다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이 부인은 크게 자책을 했습니다. ‘저런 미물도 자기 남편이 죽을까봐 부지런히 양식을 날라다 먹이는데 나는 저 미물만도 못하구나!’ 하고 도마뱀도 놓아주고, 도망갈 생각도 버리고 울면서 그 사실을 남편에게 말했더니 남편은 자기도 눈치를 다 채고 있었다고 하면서 ‘나는 기왕에 죽을 몸 이젠 되었으니 어서 당신 갈 길을 가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부인은 끝까지 남편을 잘 간호하고 돌보아서 결국 병도 낫고 벼슬까지 하게 해서 잘 살았다고 합니다.
오늘날도 미물과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뜨거운 사막의 나라에 가서 고생을 하며 피땀 흘려 벌어서 보낸 돈을 춤을 추러 다니며 제비족에게 다 갖다 주는 여자가 있는가 하면, 걸핏하면 연약한 아내를 개 패듯이 두들겨 패며 남자라고 오기를 부리는 사람이 있고 또한 처 자식은 헐벗고 굶주리는데 술 퍼마시고 투전해서 돈을 다 없애버리는 한심한 인간도 있습니다. 개나 돼지나 닭같은 짐승은 암놈, 숫놈이 절대로 싸우는 법이 없는데 사람은 부부가 싸우고 다투는 집이 많습니다.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의 가정은 절대로 그래선 안되겠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가정은 누가 봐도 부러워하는 행복한 부부 관계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이에 우리는 오늘 원만한 부부 관계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 두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본문 5:25에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고 했고 28절에는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피를 흘려 주시고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남편들도 아내를 그와 같이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함으로 남편의 참된 권위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는 않고 남편의 권위만 내세우는 쓸데없는 고집과, 왕처럼 군림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벧전 3:7 에는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물론 남편만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피차 복종하라’ 고 했듯이 피차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부부간의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첫째는,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흔히 결혼하면 서로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다가 서로 기대가 어긋나서 사네 못사네 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상 사랑은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주고 또 주고도 못다 준 것같이 여기는 것입니다. 남편은 ‘어떻게 아내를 사랑해줄까?’ 아내는 ‘어떻게 남편을 사랑해줄까?’ 를 생각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사랑해 주려고 할 때 피차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어떤 부부가 결혼을 해서 어떻게 하면 절대 싸우지 않고 행복하게 잘 살까 하고 생각하다가 남편이 제의를 했습니다. ‘내가 밖에서 기분이 나쁘면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들어올테니 위로해 주고 서비스를 잘 해주시오!’ 아내는 ‘내가 집에서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앞치마를 삐딱하게 돌려 찰테니 위로해 주고 어루만져 주세요’ 하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얼마동안은 서로 기분 나쁠 때 위로해 주고 서비스를 잘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일이 생겼습니다. 남편의 모자도 삐딱, 아내의 앞치마도 삐딱하게 돌아가 있었습니다. 그러자 서로 위로해 주기를 바라고 먼저 위로해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의논하기를 서로 똑같이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는 서로 먼저 위로해 주고 서비스해 주기로 하였습니다. 이는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상대방 중심으로 하여 무엇인가 먼저 주려고 할 때 사랑 안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둘째는, 용서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듯이 부부간에도 서로 허물과 실수가 있어도 이해하고 용서하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부부는 마치 허물과 단점을 들추어 내기 위해서 결혼한 것 같은 부부가 있습니다. 영국에서 어느 부부는 치약을 짜 쓰는데 한 사람은 중간에서부터 눌러 쓰고, 한 사람은 끝에서부터 짜 쓴다고 싸우다가 결국 이혼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찮은 것 가지고 이해하고 양보하지 못해서 이혼까지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부부간에 혹 다투어도 서로 자존심 세우느라고 오래 끌지 마십시오. ‘분을 내어도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고 했습니다. 혹, 다투었다가도 속히 화해하도록 하십시오. 부부간에 자존심을 세우면 뭘 하겠다는 말입니까? 먼저 상대방을 용서하고 화해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부부간의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입니다.
성경은 ‘사랑은 악한 것을 기억하지 아니한다’ 고 했습니다. 남편이 실수하고 잘못한 것을 몇 년 씩 두고두고 들추어 내서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들 못 낳고 딸만 낳았다고 걸핏하면 투정하고, 시집올 때 많이 해 오지 않았다고 두고두고 이야기 한다든지 하는 것은 다 비열한 짓입니다. 허물과 약점이 있는 것을 들추거나 꼬집지 말고 상호 감싸주어야 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 고 했습니다.
셋째는, 구체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부부간에는 사랑하는 마음이나 감사하는 마음을 속으로만 품고 있지 말고 좀 지나치다 할 정도로 표현해야 됩니다. 말로도, 행동으로도, 글로도, 선물로도 사랑을 표현할 때 항상 신선하고 원만한 부부관계를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근데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사랑의 표현을 쑥스럽게 생각하거나 점잖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영국의 어떤 부인은 남편이 너무 무뚝뚝해서 고민하다가 병이 나서 죽게 되었습니다. 이 여자는 남편의 마음에 들게 해 보려고 최선을 다 했는데도 사랑한다거나 예쁘다거나 훌륭하다는 말을 생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고민하던 끝에 병이 나서 죽게 되었습니다.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남편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당신은 참 좋은 아내였는데 당신이 죽으면 나는 어떻게 하지’ 하더랍니다. 그 고백을 처음 들은 아내는 얼굴이 환하게 피면서 ‘여보, 진작 그 말을 해 주시지 왜 이제야 하세요. 나는 당신의 마음에 안드는 아내인 줄 알고 고민하다가 이렇게 병이 났다오’ 하면서 운명했다고 합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부모는 자식에게 칭찬과 감사와 사랑을 표시해야 합니다. 전 가끔 책을 읽다가 머리에 안 들어올때는 편지 한 두장을 쓰고 나면 집중이 잘 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아는 어구를 다 동원해서 칭찬하며 ‘당신은 청초한 코스모스같고 눈은 맑은 호수 같다’ 고 속에도 없는 말을 휴지조각에 써서 ‘여보 읽어봐’ 하고 내밀면, 그것을 읽고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거짓말인줄 알면서도 좋다며 그것을 핸드백에 모아 두는 것을 보고 과장이 되어도 좋으니 아내에게, 남편에게 좋은 점을들어 칭찬하고 감사할 때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자식들은 일어나 사례하며 그 남편은 칭찬하기를 덕행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여러 여자보다 뛰어난다 하느니라” 라고 말입니다.
2. 서로 복종해야 합니다.
여자는 다소곳하게 남편에게 복종하는 미덕이 있어야지 남편을 지배하려 들거나 싸우려고 들면 결코 행복한 부부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잠언 21:9에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고 했습니다. 본문 5:22에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고 했습니다. 특히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될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이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아내들도 남편에게 복종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고전 11:3 에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 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아내는 남편의 몸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담이 잠든 사이에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하와를 만들었습니다. 아담의 몸에서 하와가 나온 것이지 하와의 몸에서 아담이 나온 것은 아닙니다. 아담이 있고 난 후 하와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아내들도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와를 아담의 머리뼈로 만드시지도 않고 아담의 발가락 뼈로 만드시지도 않고 몸의 한 가운데 갈비뼈로 만드셨다는 것은 아내가 남편보다 놓은 것도 아니요, 낮은 것도 아니라 남편과 평등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남편보다 열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정의 질서상, 가족 구성원의 기능상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믿음 안에서 복종해야지 죄 짓는 일이나 신앙 생활을 못하게 하는 데는 복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엡 5:21 에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고 했으므로 남편도 아내에게 복종할 것은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말씀대로 행하며 누가 봐도 부러워 하는 복되고 사랑스런 부부, 화평한 가정이 되도록 합시다.
사랑이 넘치는 가정
( 고전 13:4-7 )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 고전 13:4 )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그래서 5월의 둘째날인 오늘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첩경인 가정 안에서의 사랑의 문제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크리스챤의 가정은 세상의 어떤 가정들보다도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고로 우리 성도들은 가정에서 먼저 사랑을 실천해야 되겠습니다. 제 가족, 제 식구만 아는 사람도 이기주의자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지만, 또한 자기 가정에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면 다른 사랑은 위선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면 가정에서 사랑을 실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 서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야 합니다
서로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며 사는 가정, 서로 상대편 중심으로 생각하며 사는 가정은 분명히 사랑이 넘치는 행복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좋은 옷도 잘 못 사주고 외식 한 번 제대로 못해 주는데 종일 아이들 데리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참 고생 많지…’ 하고, 아내는 남편 입장을 생각하면서 ‘종일 윗사람 눈치 보면서 뼈빠지게 일해서 가족들 벌어 먹이느라고 얼마나 수고하실까…’ 하며 서로서로 상대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서 살아가면 복된 가정이 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시어머니라면 나 같은 며느리 두었을 때 섭섭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내가 저렇게 나이 젊은 며느리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바꾸어 놓고 생각한다면 고부간에도 의가 나쁠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 입장만 생각해서 ‘내가 어떻게 정성들여 키운 자식인데… 내 아들 사랑을 몽땅 빼앗아 가는구나’ 하고 생각만 하니까 마음 편할 날이 없는 것입니다.
부모는 세대가 달라진 오늘날의 자녀들의 입장을 생각해 주고 자식들은 옛날 고생하며 지내오신 부모님의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야 될 줄 압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한다’ 고 했습니다. ‘내가 저 사람의 입장이라면 어떨까?’ 하며 항상 바꾸어 놓고 생각하는 가정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목사의 입장을, 목사는 교인들의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면 교회도 역시 평안할 것입니다.
2. 먼저 주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꿈에 천국엘 갔는데, 모두들 만반진수를 차려 놓은 상에 앉아서 뻗정 손으로 1m나 되는 젓가락을 들고 서로 먹여 주면서 희색이 만연하여 행복하게 지내더랍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베드로에게 지옥을 좀 보여 달라고 했더니 보여 주는데 똑같은 탁자에 똑같은 음식을 놓고 1m나 되는 똑같은 젓가락을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바싹 마른 얼굴에 살기가 등등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배가 고파서 굶어 죽어가고 있더랍니다.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먹여줄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만 퍼 먹으려고 애를 쓰는데 몸은 움직일 수가 없고 1m나 되는 긴 젓가락이니 입에 갖다 넣을 수는 없고 하니까 전부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더랍니다. 이 이야기는 행복을 누리는 비결을 잘 설명해 주는 상징적인 이야기라고 봅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라’ 는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황금률 아닙니까? 내가 사랑을 받고 싶으면 남을 내가 먼저 사랑해 주고, 내가 칭찬받고 싶으면 내가 먼저 칭찬해 주는 생활을 해야 사랑이 실현됩니다.
제가 결혼 주례할 때마다 늘 하는 말 가운데 하나는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유치원 아이들은 늘 달라고만 하고 받으려고만 하는데 성숙한 사람은 주려고 합니다. 용서해 주고, 기쁘게 해 주고, 편안하게 해 주고, 이해해 주고, 이렇게 주려고 할 때 그런 가정은 행복합니다. 이기주의적인 남편, 이기주의적인 부인은 자기만 위해 달라고 하고 자기만 사랑해 달라고 합니다. 그런 부부는 얼마 못갑니다. 가령 부부가 사랑이라고 하는 사과를 나누어 먹을 때, 남편은 아내가 맛있게 먹을 때까지 기다려야 되고 맛있게 먹도록 도와 주어야지, 아내는 한 입도 안 먹고 맛도 못 보았는데 혼자 다 먹어버리면 안됩니다. 이기주의자입니다. 아내는 아내대로 제 고집만 부리지 말고 남편을 최대한 편안하게 해 드리고 기쁘게 해 드려야 좋은 아내입니다.
내 기분 맞춰 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상대편의 기분을 이해해 주고 맞추어 주도록 노력할 때 분명히 행복한 가정이 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사랑을 주는 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걸치 아니한다’ 고 했습니다.
3. 겸손히 섬겨야 합니다.
가정에서 사랑을 실천하려면 교만함이나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히 섬기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언젠가 군목 수양회 때 가정이 파산되어 이혼 직전에 있던 한 부부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화합이 되어 돌아올 때까지 서로 팔장을 끼고 잠시도 떨어지지 않는 것을 보고 참으로 기뻤습니다. 그 목사님은 키가 훤칠하게 크고 잘 생기고, 사모님도 얼굴이 희고 눈이 부리부리하게 잘 생긴 이상적인 부부처럼 보였는데, 왜 이혼 직전에 왔었는가 하면 서로 잘 생긴만큼 서로 고집을 부리고 교만해서 어느 편 하나 자존심을 굽히려 들지 않고 제 고집만 부렸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하찮은 일로 이혼까지 할 뻔 했는데 다행히도 그 수양회를 통해 각자 자기 잘못이었다고 하면서 재결합되었던 것입니다.
가정 안에서 부부간에, 식구끼리 무슨 자존심이 필요하며, 교만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갈 5:13 에 보면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고 했습니다.
서로 섬기는 데 대한 좋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한 화목한 가정이 있었는데, 하루는 가장되는 큰 아들이 옷을 사입고 와서 바지가 길다고 하면서 줄여달라고 했습니다. 열 두 시쯤 그의 아내가 조용히 일어나 바지를 줄여서 다려 놓았습니다. 3시쯤 어머니가 일어나서 ‘며느리가 고단한데 언제하랴’ 생각하고 일러준 대로 싹둑 잘라서 다려 놓았습니다. 시누이는 시누이대로 새벽에 일어나 그만큼 잘라서 걸어 놓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바지를 입어보니까 거의 반바지가 되어서 온 식구가 재미있게 웃고 조금 더 잘라서 반바지로 입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비록 바지는 반바지가 되었어도 가정은 더욱 사랑이 넘치고 화목해진 것입니다.
여러분, 서로서로 겸손히 섬기는 생활을 합시다. 세상에서 가장 삭막하고 외로운 장소는 사랑이 없는 곳입니다. 가정은 사랑의 보금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4.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보야야 합니다.
사랑의 눈은 긍정적인 눈입니다. 가급적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도록 해야 그 가정이 화평하고 행복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참는다’ 고 했습니다. 가령,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볼 때, ‘저것이 들어와서 애지중지 키운 내 아들의 사랑을 빼앗아 갔지’ 하고 밉게 보기 시작하면 발꿈치까지 트집 잡는다는 말대로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만 보이는 법입니다. 그러나 ‘고습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 는 말이 무엇입니까? 사랑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좋게 보이고 긍정적으로 보이는 법입니다. 다른 사람이 다 실망을 하고 믿어주지 않고 소망을 갖지 않아도 사랑을 가진 부모는 그 자녀에 대해 실망하지 말고 끝까지 믿고 힘쓰기를 바랍니다. 남의 단점만 찾아보려 들지 말고 장점, 좋은 점을 찾아보고 칭찬하도록 힘씁시다.
주님은 자신을 배신하고, 저주하고 도망간 베드로에게도 부활 후 제일 먼저 찾아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고 사명을 부여했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마침내 수제자로서 큰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못자국을 보여달라고 하던 의심많은 도마도 주님께서는 들어 사용하사 순교하기까지 힘있게 복음을 증거한 귀한 사도가 되게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주님은 당신의 가족된 우리 성도들이 비록 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이지만 끝내 긍휼과 자비로 대해주시고 주님의 귀한 일을 맡겨 복된 삶을 살게 하십니다.
고로 우리 성도들은 가정에서도 긍정적인 눈을 가지고 바라 보도록 합시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단점은 있는 법이고 아무리 몹쓸 사람같이 보여도 어느 구석엔가 장점이 반드시 있는 법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 입장을 서로 바꾸어 생각하며, 사랑을 먼저 주는 생활을 하며, 겸손히 섬기는 생활을 하며, 긍정적인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가운데 사랑을 실현하는 가정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가정의 행복을 이루는 가장이 되려면…
( 엡 5:25-30 , 엡 6:4 )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과 같이 하여라(엡 5:25)
오늘의 본문은 한 아내의 남편이요 자녀의 부모로서의 한 가정의 가장들이 주의 깊게 들어야 할 내용입니다. 어떤 공동체나 그 안의 최고 책임자는 실로 중요한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로서, 그가 얼마만큼 책임있게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올바르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 공동체의 행. 불행이 결정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가정을 행복하게 하는 데는 여자의 책임만 큰 것이 아니라 가장된 남자들의 책임도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가정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고 행복하게 하는 가장이 되려면 어떤 가장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1. 악한 것에 물들지 않은 가장이어야 합니다
많은 가정들이 불행하게 되고 파산되는 가장 큰 원인 중에 하나는 가장 되는 사람이 악한 것에 취하고 중독되는 것입니다.
전에 북한에 살 때, 우리 집에 세든 집 아저씨가 아편쟁이였던 것이 생각납니다. 겉모습은 그렇게 미남이고 상냥한데 나중에 알고 보니 마약중독자였습니다. 마약이 떨어지면 부들부들 떨거나 눈을 뜨지 못하고 땀만 흘립니다. 처자식이 굶어도 물건 내다 팔아서라도 아편을 맞고, 도적질을 해서라도 아편을 맞아야 했습니다. 결국 비참하게 죽고 가정이 파산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술에 중독된 사람도 패가망신합니다. 가장이 술에 중독돼서 가정이 파괴되고 식구들이 비참하게 되고 불행하게 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천재 음악가 바하(Johann Sebastian Bach) 나 슈베르트(Franz Schubert) 같은 사람도 술에 중독돼서 가정이 파산되고 일찍 죽었습니다. 씽클레어(Upton Sinclair)는 말하기를 ‘술은 천재들의 발아래 놓인 가장 큰 덫이다’ 라고 했습니다.
캐나다의 매킨타이어(McIntyre) 란 사람은 술 사먹기 위해 자기 금광을 25달러에 팔았는데, 몇 년 후에 2억 3천만 달러로 올랐다고 합니다. 술에 중독되어 헐값에 팔아버린 것입니다.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은 16살에 마케도니아의 치리자가 되었고, 18살에 승전 장군이 되었고, 20살에 왕이 되어 33살에는 당시 눈에 보이는 세상을 다 정복했습니다. 그러나 33살에 술 중독으로 미친 사람처럼 죽어버렸습니다. 당시 그는 보이는 세계는 다 정복했으나 자기를 정복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몸의 건강을 위해 마셨고 다음에는 축배를 들기 위해 마시다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술은 자신도 망치고 가정도 파괴하고 나라도 망하게 합니다. 잠 23:29, 30 에 보면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없는 창상이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이것이 마침내 뱀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 5:18 에서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고 했습니다. 딤전 3:8 에는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해야 된다” 고 했습니다.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으니 술은 입에 대지도 말아야 합니다.
무엇에 중독돼서 내 마음대로 그만 둘래야 그만 둘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악한 마귀의 올무에 빠진 증거입니다.
담배에 중독돼서 끊을 수 없다는 것도 배후에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은 안 피우는 사람보다 암병이 훨씬 더 많이 걸립니다. 가장이 담배 피우는 집의 어린이는 감기도 몇 배나 더 걸리고, 태아에게도 큰 영향을 줍니다. 미국 담배나 한국 담배나 반드시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는 글귀가 꼭 적혀 있잖습니까?
그 외에 도박에 중독된 사람, 색에 중독된 사람도 다 사탄 마귀의 올무에 걸려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자신을 망치고 가정을 불행과 파탄에 몰아 넣는 것입니다. 투전하다가 전답 팔아먹고 재산 날리고 거지가 된 사람이 이 세상에 그 얼마인지 모르고, 도박하다가 돈 잃고 자살한 사람도 얼마인지 모릅니다.
좌우간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가정이 행복하려면 가장이 악한 것에 중독되어 자제력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도 그런 것은 보지도 말고 그런 자리에 앉지도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잠 5:18-21 , 마 5:28 ).
2.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가장이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에는 자녀들 보고 부모를 공경하라고만 하지 않고, 4절 엡 6:4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고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자녀들은 하나님이 잘 키우라고 맡겨주신 하나님의 자녀이지, 함부로 욕하고 때리라는 화풀이감이 아닙니다. 학대해도 되는 옛날 노예처럼 생각하거나 내 멋대로 취급해도 되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가장들이 분별없이 자녀를 구타하고 욕을 퍼붓고 악담 저주합니다. 내가 낳았다고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내 자식이 아닙니다.
어떤 아버지는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죽일 듯이 몽둥이나 들고 덤벼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 자식들이 불만을 가지고 부모를 존경하지 않고 도리어 반항하고 비뚤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자녀들이 잘못하였을 때는 사랑의 징계를 가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것도 자녀들이 납득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이 하여 감정이 악화되지 않도록 사랑으로 타이르고 훈계하고 체벌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이에 잠언 19:18 에서는 “네가 네 아들에게 소망이 있은 즉 그를 징계하고 죽일 마음은 두지 말지니라” 고 했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깊은 사랑과 이해심을 가지고 자녀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무디 선생은 말하기를 ‘세상의 모든 사람의 존경을 다 잃더라도 나는 불행하지 않다. 그러나 자식에게서 존경심을 잃으면 나는 불행할 것이다’ 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자식들한테 무섭기만 해서는 안 되며 진정으로 그 마음에 존경하는 경외심을 갖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성공적인 변호사가 평생 잊을 수 없는 선물을 말했습니다. 크리스마스 때 아버지가 작은 선물 상자를 주셨는데 그 속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답니다. ‘아들아, 금년에 365시간의 선물을 네게 주겠다. 매일 저녁 식사 후 한 시간씩을 네게 준다. 그것은 네 것이다. 네가 원하는 이야기도 할 수 있고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도 네가 원하는 오락을 할 수도 있고 그 시간은 네 것이란다.’ 이것을 소개한 후 변호사가 이어 말하길 ‘물론 나의 아버지는 그 약속을 지키셨을 뿐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그 선물을 주시곤 했습니다. 나의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선물이었습니다. 나는 그 시간의 결과로 오늘의 내가 된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가장되시는 분들이여, 당신은 과연 자녀들에게 어떻게 하시고 계십니까?
3.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으로서의 가장이 되어야 합니다
엘리자베스 여왕 때 쿠퍼(Dr. Thomas Cooper) 라는 사람은 30,000 단어 짜리 사전을 만들기 위해 8년 동안 수집해 놓은 자료 노트를 그의 아내의 실수로 몽땅 불태워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쿠퍼 박사는 밖에서 들어와 아내의 경솔한 짓을 알고도 화내지 않고 깊은 한숨을 내 쉬며 ‘디나, 디나, 세상에 이런 큰 실수를 저지르다니…’ 하고는, 다시 8년을 수고하여 자료 수집을 했다고 합니다. 사랑이 있었기에 아내의 허물을 묵묵히 덮어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장의 사랑이 없는 가정은 사막같이 삭막한 곳이 될 것입니다. 맥킨지(E. C. MeKenzie)는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곳은 사랑이 없는 인간의 마음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태리의 금언 가운데 ‘내가 죄를 범할 때 남편도 결코 죄가 없지 않다’ 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내의 잘못은 그 아내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 남편의 책임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아내 하와를 지으실 때에 아담의 갈비뼈를 취했다는 것은, 아내는 첫째, 남편보다 높지도 않고(머리뼈), 낮지도 않고(발가락 뼈), 부부는 평등하다는 뜻이며 둘째, 아내는 남편의 사랑의 대상(가슴) 임을 암시하는 것이며 셋째, 아내는 남편의 보호의 대상(갈비) 임을 나타내는 것이며 넷째, 부부는 둘이 아니요, 한 몸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은 너무 까다롭고 율법적이면 안 됩니다. 아내를 진정 사랑해 주고, 용서해 주고, 덮어줄 줄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미국에 어떤 부부는 이혼하려고 법정에 왔는데, 원인은 치약 짜는 것 때문에 따지고 말다툼한 것이었습니다.
영국의 한 주부가 오랫동안 이름 모를 병을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되었는데 죽음에 임박하자 무뚝뚝한 남편이 처음으로 ‘여보, 당신이 죽으면 나는 어떻게 해? 당신은 참 착하고 좋은 아내였는데’ 라고 말하자, 아내는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여보, 정말이예요? 나는 그것도 모르고 당신이 하도 말을 안해서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는 줄 알고 고민하다 병이 되었어요. 그러나 이제는 늦었어요’ 하고 얼마후 숨졌다고 합니다.
특히 남편들은 아내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칭찬해 줄 줄 알아야 합니다. 빌리 선데이(Billy Sunday)는 ‘아내가 깜짝 놀랄 정도로 칭찬해 주도록 하라’ 고 했습니다. 말로 해도 좋고 때로는 편지를 써서 표현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가장의 권위만 내세우지 말고 잘못했을 때는 ‘여보, 미안해, 내 잘못했소’ 하고 사과도 해야 합니다. 핵우산이란 말이 있지만, 가장의 ‘사랑 우산’ 밑에 있는 가정은 행복합니다.
엡 5:24 의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는 말씀을 항상 기억하고 그대로 실행하십시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처럼, 아내는 남편의 한 몸이요, 지체입니다.
4. 영적으로 바로 선 가장이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가장이 바로 서고 굳건한 믿음을 가질 때 그 가정은 진정 복되고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의 많은 가정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노아로 인해 홍수 심판에서 구원받은 그의 가족과 아브라함으로 인해 풍요로운 축복을 누린 그의 가정, 그리고 가족 뿐 아니라 종들과 주위 이웃까지 구원의 축복을 받게 한 백부장 고넬료 등 많은 가정들이 그 가장의 신앙을 통해 행복을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만 영적으로 바로 섰다고 하여 온전한 가정의 행복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노아의 8 식구가 다 구원받지 못하고 몇 사람은 홍수 심판에 처해졌다면 얼마나 큰 슬픔이었겠습니까? 가장이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면서도 아내와 자식을 아직 구원 못 시켰거나 부모를 구원하지 못한 채, 함께 산다면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고로 영적으로 바로 선 가장이라면 다른 가족들도 신앙 안에서 바로 서도록 이끌고 보살펴야 합니다. 영적으로 하나 된 가정이야말로 행복이 넘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굳건한 신앙을 가진 가장을 중심으로 온 가정이 함께 머리 숙여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기도할 수 있는 가정이라면 어떤 난관과 고난도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셋방살이를 하고 초가집 속에 살아도 온 식구가 함께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가정은 참으로 복된 가정입니다.
성도 여러분,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참으로 영적으로 바로 서서, 악한 것에 물들지 않고, 자녀를 사랑으로 양육하고, 아내를 내 몸같이 사랑하는 좋은 가장을 중심으로 한 화목한 가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 가정의 달,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5월, 가정의 달’ 설교는 주제가 정형화 되어 얼핏 보면 쉬워 보이지만, 가정의 면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설교는 훨씬 어렵다.
가정의 달 설교는 삼사대가 한가족을 이루는 전통적인 가족으로부터 갓난 아기를 두고 있는 신혼부부 가정, 자녀를 출가시키고 둘만 남은 노부부 가족, 그리고 다문화 가정, 이혼 가정, 홀부모 가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가정을 대상으로 한다.
또한 가정의 달 설교는 많은 가정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문제와 결핍, 곧 고부간의 갈등과 부부간의 갈등, 그리고 자녀의 탈선, 또한 불임과 이혼 등 각기 다른 상황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가정의 달 설교는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좋을까?
가정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말하라
유명인과 연예인의 이혼, 가정 폭력, 그리고 아동학대가 만연해 가는 가정에 대한 부정적인 소식들 속에서 가정의 신성함과 소중함은 상대적으로 현대인에게 망각되어져가는 듯하다.
그러나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지어주신 최초의 공동체요, 신성한 공동체로서 가정의 중요성과 아름다움, 그리고 그 변함없는 가치에 관해 말해야 한다. 가정의 달 설교를 이 진리에 기반하여 시작하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하다.
첫째, 하나님의 선물인 가정의 소중함이야말로 다양한 형태와 문제를 가진 가정들이 포기하지 않고 지향해야 하는 원형적 가치와 소망을 제공해준다.
둘째, 소중하게 지켜야 할 가정 공동체의 중요성은 계시의 말씀과 그것의 적용적 원리에 관해 다루는 연속적인 설교에 귀기울여야 할 근거를 제공해준다. 따라서 매번 설교의 서두에서 이 진리는 반복되어 선포될 필요가 있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가정의 아름다움, 우리를 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가정의 소중함을 말하라.(창 1:31)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라
가정 사역을 전문으로 하는 한 기관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설교자들이 가정의 달 설교 준비로 가장 고민되는 점에 관해 ‘다양한 가족형태를 포괄하는 가정설교 준비’(39%)라고 답했다.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그러한 가정 형태에 관해 이혼가정(43%), 동성애 가정(21%), 한부모 가정(10%), 불임 가정(8%), 싱글 가정(4%), 재혼 가정(4%), 비혼 가정(3%), 다문화 가정(3%), 기러기 가정(2%)이라 고백했다.
목회자의 이러한 고민은 주로 성경이 제시하는 기준과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가정들이 설교로 인해 받게 될지도 모를 상처와 관련된다. 특히 이혼이나 동성애와 연관된 가정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이런 주제를 설교자는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가장 쉬운 방법은 그러한 주제를 설교에서 회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 본질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게 되며 자칫 교회 공동체 전체의 성경적 기준이 느슨해지는 결과를 초래 할 수 있다. 또 다른 극단은 그러한 상황을 강하게 정죄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진리를 말했을 지라도 우려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이런 경우 바람직한 설교적 접근은 우리 주님께서 그러하셨듯, 양극단을 피하고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기준을 타협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사랑 가운데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종인 설교자는 예민한 주제에 관해 세상의 주류적인 견해와 다르다 해도 그리스도의 말씀에 신실해야 한다. 또한 설교자는 양들을 돌보는 목회자로, 우리 주님이 그러하셨듯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해야 한다.
아울러 이러한 주제를 다룰 때 유념할 부분은 악트마이어(E. Achtemeier)가 적절하게 말하듯, 하나님의 당위적 명령만이 아니라 가정의 파탄과 왜곡, 그리고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구렁텅이에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보수하시고 치유하시는 분이심을 함께 말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민한 문제는 진리와 사랑으로 접근하라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는 것에 관한 구체적인 원리로 존 스토트(J. Stott)가 동성애를 다루는 방식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동성애에 관한 전통적인 관점에 본격적인 문제를 제기했던 데릭 베일리(D. Bailey)의 주장에 관해 스토트는 성경의 통전적 해석을 통해 동성애가 비성경적인 것임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스토트는 교회내 동성애자들에게 동성애 행위와 동성애 관계의 중단을 요청할 때 그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올바른 태도를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제시한다.
첫째, 믿음으로, 하나님의 기준을 인정하는 것과 둘째, 소망으로, 내재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인한 자유와 주님의 날에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소망을 품는 것과 셋째, 사랑으로, (동성애의 기저에는 깊은 고독과 사랑에 대한 갈망이 있음으로) 적대적인 자세를 지양하고, 지역교회가 사랑으로 돌보고 조력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스토트가 제시하고 있는 이러한 원리는 동성애의 문제 뿐 아니라 성경이 제시하는 기준으로부터 이탈하거나 결핍을 가진 다양한 가정에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원리라고 생각한다. 참된 사랑은 타협하지 않으며 모든 이들의 유익을 위해 진리를 말한다. 동시에 그것은 순수한 형제애로 도울 바를 찾는다.
설교가 살아 움직이게 하라
가정의 달, 설교의 내용은 대체로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가정과 가족 간에 사랑하며 섬기는 화목한 가정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다. 가정의 달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여 회중들이 실천적인 삶의 설교로 화답할 수 있는 때이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의 노스포인트커뮤니티 교회(North Point Community Church)의 앤디 스탠리(A. Stanley)의 제안은 유용하다. 스탠리는 설교에서 거창하고 위대한 실천적 적용보다는 단 한 주라도 교인들이 실제로 실행할 수 있는 일들을 제시할 것을 권면한다.
예를 들어, 부모와 자녀 간에 감사와 사랑의 편지를 나눌 것을 권면할 수 있다. 한 주간 동안 가족 중 한 사람이 집을 떠나거나 돌아올 때 모든 가족이 나와 환호하며 맞는 것을 제안할 수 있다. 가족 간에 사랑과 감사를 고백하며 아침저녁으로 안아줄 수 있다.
아울러 부부간의 세족식, 특히 남편이 아내의 발을 정성스럽게 씻어주는 세족식은 믿음의 가정에 권면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 온 가족이 모인 가운데 짧은 기도와 함께 남편이 아내의 발을 정성스럽게 씻어주라.
그리고 그 장면을 자녀들로 하여금 스마트폰으로 녹화하게 하라. 그 시간은 분명 가족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시간이요, 특히 자녀들에게 기독교 가정과 세상 가정의 차이를 일깨우며, 거룩하고 아름다운 가정에 대한 소망을 품도록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5월이야말로 설교가 살아 움직여야 할 때다.
가정예배의 중요성을 더욱 독려하라
가정은 교회와 분리된 공간이 아니라 변함없이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경험해야 하는 공간이다. 랍비, 예키엘 엑스타인(Y. Eckstein)이 말했듯, “쉐마의 기도와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가정에 임하고 샬롬이 임한다”
이런 맥락에서 가정예배의 중요성은 가정의 달, 설교를 통해 더욱 독려할만하다. 특히 가정예배는 언택트로 교회가 충분한 기능을 할 수 없고 목회자의 돌봄이 취약한 코로나의 상황에서 더욱 요청된다.
그것은 코로나로 인한 예배와 관계의 결핍을 채워줄 뿐만 아니라 신앙 안에서 유대와 사랑을 더욱 굳건하게 할 수 있다. 또한 예배가 으레 그러하듯, 그것은 가정 예배로만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가족 간의 자연스런 나눔과 축제로 이어진다. 이러한 모임의 의미를 세르티양주(A. Sertillan ges)는 이렇게 말한다.
“가족은 그 지혜를 나눌 것이며, 조용히 대화하며 영혼을 단결시키고, 저무는 하루는 위안을 얻을 것이다. 조화로운 분위기가 가정을 감쌀 것이다. 그리하여 매일 저녁은 가치있는 축일 전야가 될 것이다.” ‘
행복한 가정은 미리 누리는 천국’이라고 한 시인은 말했다. 옳은 말이다! 하나님의 포근한 날개 아래 한상에 둘러 먹고 마실 때 우리는 이 땅에 미리 임하신 낙원을 경험한다.
가정의 든든한 기초 (행 10:1-8)
가정의 든든한 기초 (행 10: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 위에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원래 ‘성결교회 주일’이지만, 저는 특별히 ‘가정 주일’로 지키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정의 달 5월을 어린이 주일과 어버이 주일 등으로 잘게 나누다 보면, ‘가정’을 전체로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린이와 어버이의 문제는 바로 가정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가정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가정이 흔들리고 무너진다고 말을 합니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대체로 다음과 같이 들고 있습니다.
첫째로, 오늘날의 가정이 위기에 빠진 것은 남자가 아버지와 남편으로서 가정에서 감당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경쟁이 심한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정신없이 일해야 하는 남자들은 가정에서 자녀들과 아내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갖지 못합니다. 요즈음 남자들은 가정에서 단지 잠자고 밥만 먹은 하숙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자녀들과 아내와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하기 때문에 점점 더 외톨이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남자들은 가정에서 설자리를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누려오던 가장의 권위를 상실해 버렸습니다. 비록 부작용이 많긴 했지만, 그래도 그 동안 남자가 아버지의 권위를 가지고서 가정의 버팀목 역할을 해왔는데, 이제는 이 ‘버팀목’이 완전히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빠, 바빠, 나빠”라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었습니다.
둘째로, 오늘날의 가정이 위기에 빠진 것은 가정 주부가 아내와 엄마의 역할을 포기하고 문밖으로 나돌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남편과 자식들만을 위해 한평생 헌신하며 희생하며 살아온 주부들은 하숙생이 된 남편과 이기적인 자식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기 십상입니다. 이토록 남편들과 자식들로부터 무시를 당하는 주부들은 심한 소외감과 허탈감을 보상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돌게 됩니다. 물론 취미생활과 같은 건전한 일을 위해 바깥으로 나도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잘못하면 부동산 투기, 유흥업소 출입, 과소비 등과 같은 퇴폐풍조에 물들기 쉽습니다. 바깥을 나돌지 못하는 주부들은 가정을 온통 휘어잡으려는 욕망으로 가득 차기 쉽습니다. 직장에서 피곤한 남편을 달달 볶거나 자녀의 장래를 위한답시고 자녀를 공부벌레 혹은 공부노예로 만듭니다. 그래서 저는 “아빠, 바빠, 나빠”라는 말처럼 “엄마, 치마, 마마”라는 말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엄마가 치마 바람을 거세게 날리니까, 남편과 자녀가 온통 ‘마마 보이’가 되어간다는 말입니다.
셋째로, 오늘날의 가정이 위기에 빠진 것은 요즘 아이들이 자기들 밖에 모르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자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의 아이들은 어른과 남은 안중에도 없는 버릇없는 아이들이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요즘의 부모들이 자식의 기를 죽인다고 꾸지람을 잘 하지 않고, 공부를 잘 하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자식을 상전으로 떠받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들은 자식들의 성적에만 신경을 쓰느라고, 도덕교육과 인성교육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모든 가치관을 오직 성적에만 두고 있다보니, 주일에 친구를 사귀거나 취미생활을 하거나 교회에 가는 것조차 꺼립니다. 이처럼 자녀를 경쟁에서 꼭 이겨야 하는 살벌한 존재로 기르기 때문에 남을 배려하고 남과 협동하는 정신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설령 그들이 커서 사회에서 좀 출세하였다고 하더라도, 커서는 병약한 부모와 형제들을 쉽게 무시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저는 “아이, 아첨, 아차”라는 말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아이에게 아첨하다가 나중에는 ‘아차’하고 후회하고 만다는 말입니다.
넷째로, 오늘날의 가정이 위기에 빠진 것은 오직 자식들만을 위해 평생을 살아오신 늙으신 부모님들이 마음을 붙이고 여생을 편안히 살 곳이 점점 더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정성껏 키운 자식들은 핵가족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며느리는 시집 식구보다 친정 식구를 더 가까이하고, 아들은 며느리 눈치를 보느라 부모에게 잘 효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노인들은 병약함과 고독감 속에서 쓸쓸히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즘 들어 저는 “잘 산다는 게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회의하게 되었습니다. 잘 산다는 것이 모두가 함께 행복해진다는 뜻이 아니라면, 잘 사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사람이 돼지보다 더 나은 게 무엇입니까? 요즘 정치인들이 ‘상생’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만, 부모와 자식과 손자가 한 지붕에서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아가지 못한다면, 도대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잘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여기서도 저는 “노인, 폐인, 악인”이라는 말을 만들어 봅니다. 노인을 폐인으로 취급하는 인간은 악인입니다.
가정이 어찌하여 이와 같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까? 가정 속에 깊이 파고든 황금만능주의, 개인주의와 쾌락주의 등이 우리 가정을 병들게 하고 위기를 초래했습니다. 우리의 가치관이 완전히 천박해졌고, 인간성이 철저히 타락했습니다. 비뚤어진 가치관과 타락한 인간성은 바로 가정의 위기의 원인이요, 또한 가정의 위기를 낳은 주범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위기를 극복하고 든든한 가정을 만들려면, 비뚤어진 가치관을 바로 잡고 타락한 인간성을 바로 잡는 길 밖에 없습니다. 가정의 진정한 기초로 되돌아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특히 고넬료 가정을 소개함으로써, 든든한 가정의 기초가 무엇인지를 소개할까 합니다.
첫째로, 고넬료 가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이었습니다. 가치관이 비뚤어지고 인간성이 타락하는 가장 큰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 아버지의 집을 떠나 탕자처럼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넬료 가정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온 식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인생과 가정과 사회와 우주의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으뜸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을 경건하게 섬기는 가정만이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부족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때로는 미워지기도 하고 싫증도 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어언 듯 서로의 관계가 파괴되는 위기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런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를 항상 유지하는 데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의 거룩한 관계 위에 든든히 서 있다면, 부모 관계와 부부 관계, 식구 관계가 결코 잘못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이 온전하고 행복한 가정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경건한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고넬료 가정은 온 집으로 더불어 백성을 많이 구제하는 가정이었습니다. 구제는 이웃들과의 관계입니다. 이웃들과 서로 나누는 것은 경건한 삶의 표현입니다. 성도의 가정은 결코 자기 가정 밖에 모르는 그런 이기적인 가정이 되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모름지기 이웃들과 아픔과 슬픔을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와 가정이 심각하게 흔들리는 이유도 가족 이기주의 때문입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우리 가족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은 자신의 가정과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는 부자들도 결코 홀로 잘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내버려두는 부자들은 결국 강도와 도적, 사회 불안의 희생물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 때문이라도 부자들은 재물을 기꺼이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든든한 가정은 오직 든든한 사회의 기초 위에서만 설 수 있습니다.
셋째로 고넬료 가정은 온 집이 더불어 하나님에게 항상 기도하는 가정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기도만 하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기도는 하나님에게 상달되지 않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만약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기만 하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사랑의 실천은 얄팍한 자기 자랑, 생색내기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이웃과의 관계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인의 사귐이란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없는 나와 너와의 사귐은 그리스도인의 사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웃을 향해 사랑을 베풀고 구제하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내가 너를 사랑하고,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몸을 내놓으셨고 생명을 나누어 주셨기 때문에 내가 이웃을 위해 물질을 내놓으며 구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정의 위기 시대에 여러분의 가정도 고넬료 가정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구제하며 늘 기도함으로써 언제나 든든히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그와 아울러 흔들리고 무너지는 주위의 가정을 올바로 세워주는 복된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의 가정은 무엇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경건한 고넬료 가정을 본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온 가족이 세상의 성공을 추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법을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재물로써 어려운 이웃을 돌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서 여러분의 기도가 하나님에게 늘 상달되는 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 이신건목사 목사 설교 중에서
5월 가정의 달을 맞이 하면서
세계 모든 사람이 애창하고 있는 노래 중의 하나가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노래입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마음 속에 가정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불러 일으킵니다. 가정은 편히 쉴 수 있고 즐거움을 나누는 곳이며 서로 사랑하는 곳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조직 중에 가정보다 아름다운 조직은 없습니다. 공산주의는 가정 위에 국가를 군림시켜 인간의 행복을 빼앗아 가는 가장 악한 집단입니다. 자본주의는 물질로 가정의 행복을 사려고 몸부림 치고 있으나 이 또한 어리석은 짓입니다.
이상한 것은 ‘즐거운 나의 집’을 지은 존 하워드 펜이라는 사람은 한번도 가정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그 노랫말을 지은 곳은 프랑스 파리 였는데 엽전 한푼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을 때 이 노랫말을 지은 것입니다. 그는 한 평생 결혼도 하지 못했고 집도 없었고 아내의 사랑과 자식에 대한 소망도 가져보지 못한 채 일평생을 지구 이구석 저구석을 방황했습니다. 그후 그는 튀지니에서 사는 집도 없이 길거리에 쓰러져 죽었다. 얼마 후 그의 시체가 그의 고향인 워싱톤에 있는 오크 언덕에 이장 되었을 때 무덤이 그가 이 세상에서 가진 유일한 집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일평생 가정이 어떠한 곳인지 모를 법한 그가 어찌하여 그토록 가정을 예찬하고 있는가 하는 점일 것입니다.
한 평생을 가정을 가져보지 못한 그가 왜 가정을 노래하고 있는가? 대개 가진자는 가진 것에 대한 행복을 바로 알기 어려운 법입니다. 가정을 가진 지상의 수많은 사람이 가정의 행복을 가슴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갈 때 가정을 갖지 못한 사람이 가정에 대한 그리움을 뼈저리게 그리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가진 것에 대한 감사를 잊어 버리고 살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갖지 못한 것에 대해서 불평에 사로 잡히기 쉬운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조국에서 살 때는 조국에 대한 깊은 사랑이 없다가 국가를 잃어 버리고 포로 생활을 하면서는 날마다 조국 산천을 그리워 하며 울었던 것이다.우리는 내게 있는 것으로 행복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가정은 생활의 중심점이요 역사의 기원점이며 삶의 성패를 좌우하는 결승점이다. 인류 역사는 에덴의 한 가정에서출발 되어 졌습니다. 가정은 우리의 영과 육이 자라야 할 터전이요, 십자가의 화목 정신을 실현 해야 할 경건의 교육 장입니다. 더 나아가서 신앙 계승은 가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인간 삶을 지키는 삶의 최후 보루입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다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위대한 교육자였던 페스탈로찌는 기독교의 위대성은 국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정을 통해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프로스트는 말 하기를 세상에서 당신을 진정으로 용서해 주는 곳은 가정뿐이라고 했습니다.
가정의 달을 맞이 하면서 우리 모두는 가정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한번 쯤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비록 세상에서 가정이 없다 해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한 가족이 되고 한 아버지를 모신 형제 자매가 되기에 성도에게 가정이란 의미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5월, 가정의 달
2022년 5월 1일자 목회서신 / 곽창대 목사
“5월, 가정의 달”
5월에는 가정과 관련된 기념일이 많습니다. 어린이날(5일), 어버이날(8일), 입양의 날(11일), 스승의 날(15일), 성년의 날(16일), 부부의 날(21일) 등입니다. 그래서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가정의 달, 5월에 우리 모두는 가정의 행복을 염원합니다. 가정의 행복은 인생 행복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행복이 가정의 행복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행복하려면 5월만 아니라 일 년 내내 가정의 달로 지켜야 할 것 같습니다. 그만큼 가정이 중요합니다. 가정이 행복의 산실이어야 합니다.
누군가 가족이라는 영어단어 “family”를 이렇게 풀었습니다. ” F ather a nd m other, I l ove y ou!”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을 받은 나도 아버지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우리 가족 모두를 사랑합니다.”라는 뜻으로 확장하여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가정이 행복하려면 무엇보다도 사랑이 흘러야 합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해야 하고 그 사랑이 자녀들에게로 흘러야 합니다. 자녀들도 위로는 부모에게 옆으로는 형제자매들에게 사랑을 흘려보내어야 합니다. 당대의 사랑이 다음 세대로 흘러야 합니다. 사랑이 흘러넘치는 가정이라야 행복한 가정입니다. 행복한 가정이 되려면 가족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먼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합니다. 가정의 달 5월에는 더더욱 가족들 모두 예수님 안에서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행복을 누리고 나누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아내와 함께 5월 한 달간 미국에 있는 자녀들과 손자들을 보러 출국합니다. 교우들도 그랬겠지만 저도 코로나로 인하여 2년 넘게 휴가 없이 지냈습니다. 금번에 장기휴가를 얻어 뉴욕 맨해튼에서 사는 딸 가정과 시애틀에서 사는 아들 가정에서 반반씩 지내려고 합니다. 5월 4일에 출국하여 6월 3일에 귀국합니다. 건강하고 유쾌한 한 달이 되도록 기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번의 주일오전예배를 위하여 목사님들께 설교를 부탁했습니다. 5월 8일 어버이주일에는 안정순 은퇴목사님께서 부모공경에 관하여 설교합니다. 5월 15일 스승의 날이자 교사주일에는 박우택 목사님께서 신앙교육에 관하여 설교하십니다. 5월 22일 주일에는 김진성 은퇴목사님께서 어르신들에 관련된 설교를 하십니다. 5월 29일 주일에는 채충원 목사님께서 가정 전반에 관하여 설교하십니다. 주일오후예배와 수요기도회 및 새벽기도회는 평소처럼 교역자들이 돌아가며 인도합니다. 가정과 교회와 일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고 나누는 5월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가정의달 설교, 창2:20] 창조질서로서의 가정
창조질서로서의 가정
창 세 기 2:20-25, 골로새서 3:18-25
설교 : 유경재 목사
가정의 달인 5월 마지막 주일에 다시 한 번 성경 특히 창세기에 나타난 가정을 살펴보므로 우리의 가정들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창조의 완성인 가정
창세기 2장의 창조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의 창조가 점진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셨는데, 아직 사람을 만드시지 않아서 들에는 초목이 없었고, 채소도 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흙을 가지고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에덴동산을 창설하셨는데, 그 동산에는 온갖 아름다운 나무와 강이 흘렀다고 하였습니다. 훨씬 아름다운 세계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 혼자 있는 것이 안 좋아 보여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지으시고 아담으로 하여금 그 이름을 짓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세계가 이런 짐승들로 구색을 갖추게 되어 훨씬 보기에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안쓰러워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인 여자를 지으셔서 그와 짝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들 부부가 좋아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만족해 하시면서 그의 창조사역을 일단락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바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로 아담의 짝이 되게 하시므로 완성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이 창조 이야기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여자가 창조되고 그 여자와 남자가 결합하여 가정을 이루므로 창조가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가정이 창조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처음 창조 목적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에 속하는 것으로써 하나님이 설정하신 신성한 제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창조에서 가정이 빠졌다면 그것은 미완성 창조였을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각각 창조되었지만 저들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가정을 이루었을 때 비로소 창조의 그림은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남녀가 각각 독립하여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혼자 살면 여러 가지 편리한 점들이 많이 있겠지만, 가정이 없는 사회가 이루어질 때 그 사회가 진정으로 바람직한 사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회는 사랑이 메말라버린 이기적인 사회로 겨울처럼 찬바람만 불게 될 것입니다. 가정이 있으므로 해서 이 삭막할 뻔한 세상이 부드럽게 아름답게 따뜻하게 변화되었습니다.
피조계에 속한 가정
따라서 우리가 알 것은 가정은 창조 질서를 따라 세워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피조의 세계가 창조의 질서를 따라 운영되듯이 가정도 이 질서를 따라 세워질 때 건강하게 되고 아름다운 가정으로 자라게 될 것입니다.
창조의 질서를 따른다는 것은 바로 그 질서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따름을 의미합니다. 가정이 창조의 한 부분임을 인식하면서 다른 가정, 다른 피조물과 조화와 협력을 이루어 가도록 노력하여야 함을 뜻합니다. 가정이 하나님의 창조를 완성하는 가장 아름다운 포인트임을 기억할 때 이 가정을 잘 가꾸는 일은 바로 하나님의 창조에 협력하는 일임을 알게 됩니다. 가정이 깨어질 때 하나님의 창조의 그림은 오점(汚點)을 남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 창조의 그림을 더럽히는 인간의 여러 가지 죄악이 많지만, 가정의 파괴는 가장 큰 오점으로 이 그림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어야 한다 하신 것을 아직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신 것도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2장에서 창조 질서의 일부로서의 가정의 구성 요소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결합으로 가정이 이루어졌지만, 단순하게 두 사람만이 그 가정의 구성요소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저들을 만드시고 또 결합하게 하셨다는 사실과 땅과 하늘, 그리고 거기에 창조된 모든 피조물이 바로 그 가정의 중요한 구성요소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에 나오는 가정은 우주적입니다. 가정은 들판에 피어나는 꽃처럼 돋아나지만, 그 가정 홀로 있을 수 없고 창조주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서 모든 피조물과 호흡을 같이 할 때 비로소 그 가정이 존재하며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거기에 사랑이 있을 때 그 가정은 행복하게 됩니다. 부부가 사랑하고 부부 사이에서 자녀가 탄생하면 그 자녀를 사랑하며, 그리고 그 가정을 있게 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가 만들어 놓으신 피조 세계를 사랑할 때 그 가정은 든든하게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을 창조 질서로서 이해하면서 그 질서를 따라 자연스럽게 나갈 때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녹색운동을 하시는 김종철 교수의 어떤 강연에 나오는 이야기를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미국의 인류학자로 진 리들로프라고 하는 여성이 있는데, 이 사람이 베네수엘라 아마존 밀림에서 에쿠아나라는 원주민부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몇 년 동안 현지조사를 하였답니다. 이 학자의 주관심사는 어린아이의 양육방식이었습니다. 그 부족사회는 아주 가난하였지만 사람들 표정이 모두 밝고 늘 웃음이 끊이지 않았답니다. 이렇게 넉넉하고 행복하게 사는 까닭이 무엇일까를 찾아보는 중 아기가 태어나고 양육되는 방식이 그 원인 중 하나라고 보았습니다.
이 마을에서 아기의 탄생은 마을 전체의 공통된 관심사가 되고 마을 전체의 축복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임신부는 동네 사람들의 축하 속에서 자기가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을 한다는 느낌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기는 물론 모유를 먹고 자랍니다. 태어나면서 아기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는데, 그 보살핌은 주로 신체적 접촉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아이가 기어다니기 시작하는 아홉 달까지 어른들이 밤낮 없이 아기를 만져주고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면서 키운다고 합니다. 그렇게 양육된 아이들은 굉장히 원만하고 평화로운 심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내면이 평화로우니까 남들에게 자연에 대해서 저절로 공경하는 태도가 길러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디언들과 달리 현대인들의 출산은 공포로 일관됩니다. 아기는 병원에서 출산되면서 바로 엄마 품에 안기는 대신에 신생아실로 옮겨져서 우유를 먹게 됩니다. 편안한 엄마 뱃속에 있다가 바깥 세상에 나오자마자 엄마와 떨어질 때 그 아이의 불안과 공포는 말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그런데다 밥벌이에 바쁜 엄마가 그 아이를 떼어놓은 채 직장으로 달려가서 하루 종일 일에 시달리다 보니 그 아이가 엄마의 따뜻한 품에 안길 수 있는 시간은 극히 제한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자라난 아이들의 심성이 원만하기 어렵고 늘 불안과 불만과 짜증으로 가득 차게 되고 결국 거기로부터 폭력성이 배태되게 됩니다. 이렇게 자라난 사람들이 결국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인간이 되어 자연을 정복하고 다른 사람을 정복하려 하기 때문에 이 사회가 불안하고 근본적으로 평화를 만들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청소년들이 가정에서 사랑을 받지 못하면서 잘못된 길로 나가게 되는 현상들은 결코 우연이거나 몇몇 가정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사회구조적인 문제이며, 심각하게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창조 질서를 무시하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현대 사회 구조가 우리의 심성을 파괴하고 우리의 가정으로 파탄으로 몰고 가면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창조 질서를 회복하는 가정
우리 가정에 창조 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가정에 모시고 그를 예배함과 동시에 그가 가르쳐 주신대로 사랑을 회복하고 그 사랑으로 가정을 가꾸어 가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네브래스카 대학교의 인간 계발 및 가정연구부에서 많은 조사와 실험의 결과로 발표된 좋은 가정들의 공통점들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습니다.
첫째로 성공적이고 행복한 가정일수록 가족들 간에 감사하는 마음이나 말이 아주 풍부하다고 하였습니다.
둘째로, 가족들이 함께 시간을 많이 갖는 가정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함께 수고하고 함께 즐겁게 놀고, 함께 음식을 먹는 가족들은 훌륭한 가정을 이루어 자녀들에게 아름다운 추억과 부모에 대한 존경심을 남겨준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가족끼리 서로 대화를 많이 갖는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넷째로, 신앙을 갖는 가정들이 아주 결정적으로 행복을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가정에 어려움이 올 때에 그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처리하는 가정들입니다.
이런 공통점들을 요약하면 신앙과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좋은 가정을 이루려면 그 가정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이루도록 가꾸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신앙의 가정에서 아들이 분가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그 아들은 사업에 성공하여 좋은 집을 짓고 부모님을 초청하였습니다. 그 부모님은 화려하게 꾸민 자식의 집을 다 둘러보고 나서 그 아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얘야, 집이 참 아름답고 화려하구나. 그런데 이 집의 주인이 분명치 않구나”
그 집에는 기도하는 방도 없었고, 성경이 보이지 않았으며, 예수님 그림이나 성화가 하나도 걸려 있지 않았습니다. 신앙이 두터웠던 그 부모는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고 섭섭하였던 것입니다.
제가 심방을 다니면서 그 가정에 예수님 사진이 걸려 있는 모습을 볼 때에 마음이 흐뭇합니다. 예수님이 그 가정의 주인이 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많은 가정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 가정의 주님으로 모시지 않았기 때문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시편 16편의 기자는 하나님을 모신 기쁨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는 분, 그가 나의 곁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주님, 참 감사합니다. 이 마음 기쁨으로 가득 차고, 이 몸은 아무런 위험도 느끼지 않는 까닭은 주께서 나를 보호하셔서 죽음의 세력이 나의 생명을 삼키지 못하게 하셨으며, 주님의 거룩한 자를 죽음의 세계에 버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몸소 생명의 길을 나에게 보여 주시니,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에 기쁨이 넘칩니다. 주께서 내 곁에 계시니, 이 큰 즐거움이 영원토록 이어질 것입니다. 16:8-11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가정에 모실 때, 기쁨이 가득 하고 즐거움이 영원할 것입니다. 이런 가정들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자손이 다 복을 받을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목사님 가운데 조나단 에드워즈란 분이 계십니다. 그는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였을 당시 종교와 도덕적인 면에서 크게 타락한 사회를 신앙부흥을 통하여 바로 잡은 분입니다(1703~58). 그가 죽은 후 150년이 지났을 때 후손은 무려 1394명이었는데, 교장 13명, 교수 65명, 의사 60명, 목사 100명, 군인 75명, 관리 80명, 저술가 60명, 언론인 18명, 부통령, 상원의원, 지사, 시장, 대사, 사장 등이었다고 합니다. 훌륭한 신앙의 전통을 이은 가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좋은 가정의 두 번째 요소인 사랑을 우리 가정들이 회복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여자를 데려 오셨을 때 감탄하면서 아담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지아비에게서 나왔으니 지어미라고 부르리라!”
가족들 상호간에 서로가 서로의 뼈를 구성하고 있다는 연대감(連帶感) 혹은 소속감이 있을 때 거기로부터 사랑이 우러나게 됩니다. 오늘의 가정들이 이런 사랑을 표현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각자의 방에서 컴퓨터나 TV 앞에 앉아 있으므로 가정은 사랑으로 견고하게 결속되지 못하고 모래알처럼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족 간의 사랑도 계속 만나고 확인하지 않으면 결국 소홀해지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많은 지식을 넣어주려고 온갖 과외를 다하고 있습니다만, 막상 중요한 사랑을 가르쳐 주는 일은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스위스의 교육학자 페스탈로치가 말하기를 “가정은 최상의 학교이다. 이 학교의 교과과정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가정들은 사랑을 가르치는 최상의 학교로서가 아니라 들어와 잠자고 밥 먹는 하숙집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함이 곧 창조 질서를 회복함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랑을 잃은 가정들, 함께 모여 노래하고 즐거워하며 대화할 시간을 잃어버린 가정들, 그래서 그 가정은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둥지로서 기억되기보다는 잔소리와 짜증 부리는 소리로 가득한 곳으로 기억되어 가능하면 들어가려 하지 않는 곳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런 가정의 파괴는 창조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임을 기억하고 빨리 사랑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들을 기울여 가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가정을 이루면서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되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가정은 창조의 꽃이며, 아름다움입니다. 이 가정은 우주를 향해 열려 있으며, 창조주 하나님의 은총의 날개 아래 둥지를 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질서를 따라 돌아가는 우주의 한 복판에 이 가정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가정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 가정을 신앙과 사랑으로 가꾸기 위하여 우리의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가정은 저절로 행복하게 지켜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그의 돌보심을 받으며, 사랑을 가꾸어 갈 때 비로소 거기에 행복의 파랑새가 날아들고, 기쁨의 꽃들이 만발한 정원이 가꾸어집니다.
이제 여러분의 가정을 다시 한번 돌아보시고 창조의 질서를 따라 믿음과 사랑으로 든든하게 세워 가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주일의 설교] 행복한 가정(시 128:1~6)
좋은 관계가 행복을 만듭니다
하나님·부부·자녀와 막힘 없을 때 건강한 가정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시 128:1)
▲ 김희수 목사
한 젊은이가 유대인 랍비를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도대체 가정이란 무엇입니까?” 랍비가 대답합니다. “가정은 ‘메누카’입니다.” ‘메누카’란 히브리어로 안식의 터전이라는 뜻입니다. 가정이란 한마디로 안식할 수 있는 장소라는 말입니다. 젊은이가 질문합니다. “선생님, 영혼의 안식은 천국에 가야만 있는 것이 아닌가요?” 랍비가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영원한 안식은 천국에 가야만 있습니다. 그러나 매일 매일의 안식은 바로 가정에 있습니다.” “선생님, 그렇다면 가정이 그렇게 중요하고 가정이 우리의 삶에 참된 안식을 줄 수 있는 곳이라면 가정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무슨 조건이 있습니까?” “그 조건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헤세드’입니다.” ‘헤세드’라는 말은 큰 은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자비와 긍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통해 안식과 평안, 행복을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오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달력을 보게 되면 가족과 연관된 날들이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어린이 날, 어버이 날, 가정의 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입니다. 교회에서도 5월은 어린이 주일, 어버이 주일, 스승의 주일, 새가족초청주일로 보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가정을 중시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최초의 제도이며 모든 제도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가정이 건강하고 행복하면 교회도, 사회도, 국가도 건강하고 행복합니다. 가정이 건강하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하면 교회도, 사회도, 국가도 건강할 수 없고 행복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면 행복한 가정은 어떤 가정입니까?
행복한 가정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가정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1절)
가정이 건강하고 행복해지는 비결은 세상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말씀합니다. 천지만물의 주인이시고 생사화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고 순종하는 것이야 말로 영적으로 건강하고 가정에도 건강함을 말씀합니다. 잠언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임을 말합니다.
경외는 공손히 섬기며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이란 겁에 질려있는 공포가 아니라 지극히 존경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경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것은 행복의 첫 관문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은 일하는 가정입니다.
“네가 손으로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라.”(2절) 노동은 신성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며 복입니다. 일하는 것으로 열매를 거두게 하시고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며 보람과 행복을 주십니다. 온 가족이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의 몫을 기꺼이 감당하고 수고할 때에 그 가정은 기쁨이 있고 삶의 가치와 의미가 풍성해지는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일확천금을 노리고 한탕주의를 통해 인생역전을 노리는 곳에서 행복은 없으며 그러한 가정은 결코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없습니다. 미국과 한국에서 거액의 복권에 당첨 된 사람들과 가정을 조사해보니 대부분 이혼하고 가정이 깨어지고 자녀들이 탈선하고 알코올중독, 정신질환으로 고통을 당하여 복권에 당첨되기 전보다 불행한 삶을 살고 가정은 불행한 가정이 되었다는 보고서가 있습니다. 일하는 가정은 건강하고 행복합니다.
부부간에 좋은 관계가 있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3절) 아내를 결실한 포도나무로 표현한 것은 ‘다산’ 그 자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의 결실, 즉 그 가정의 번영과 화목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부부는 아름다운 부부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부부 관계에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심같이 헌신적으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또 아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서 순종하는 것 같이 남편에게 순종하는 헌신적인 모습을 말씀하셨습니다.(엡 5:21~33절)
오늘날 가정이 불행해지는 것은 부부의 관계가 사랑과 이해, 순종과 희생적인 관계이지 못하고 이기적인 관계로 가고 자기중심적인 행동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서로를 바라볼 때 감사한 마음이 있고 잘해주고 싶고 사랑하는 마음이 속에서부터 일어난다고 하면 제일 가까운 곳에서부터 행복이 시작되지만 미움과 원망과 보기 싫은 마음이 들게 되면 제일 가까운 곳에서부터 불행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가 좋은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3절) 부모와 자녀가 각자의 몫을 감당하고 상호 도리를 지킬 때 이루어지는 축복의 열매로서 어린 감람나무로 묘사를 했습니다. 여기에서 감람나무는 신선함과 활력, 건강하고 유쾌한 삶의 상징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나아가 어린감람나무가 원감람나무로부터 생명력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통해 부모와의 유대관계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자식은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과 상급입니다.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부모님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주의 교훈과 훈계로 말씀으로 양육 받아 순종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행복한 가정의 아름다운 모습이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날 바쁜 삶을 살아가다 보니 한상에서 같이 음식을 같이 먹을 수 있는 기회가 많지 못하지만 할 수 만 있다면 같이 식탁의 교제가 많이 있는 가정이 보다 더 행복하리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가정을 복주시고 번영과 평강이 있게 됨을 말씀합니다.(5~6절)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은 문제가 없는 가정이 아니라 문제가 있어도 그 문제를 잘 극복하고 믿음으로 이겨나가는 가정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부부간의 관계에서도, 일하는 현장에서도,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막힘이 없고 소통이 잘되는 행복한 인생, 그리고 행복한 가정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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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11일 새벽설교: 가정의 달 (화목) 잠언
가정의 달 (화목)
잠언 17:1-22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왜 5월이 가정이 달이냐면 5월에 어버이날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면 옛날에는 가정의 달이 없었는데 근래에 들어와서 왜 만들었을까요? 그 이유는 예전보다 지금이 훨씬 건강하지 못한 가정들이 생겨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 건강하지 못한 가정은 결국엔, 교회의 축소를 의미합니다. 가정이 건강하지 못하면 제일 먼저 일어나는 변화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집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떠나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성장하려면 가정들이 먼저 바로서야 합니다.
그러면 건강한 가정은 어떤 가정입니까?
오늘 본문 1절의 말씀은 아주 간략하지만 가정이 어떠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구절에 ‘화목’ 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가정은 뭐니 뭐니 해도 화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린 고기를 집안에 많이 쌓아두고 다투는 것보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어도 화목하기만 하면 그것이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본문 22절을 보세요 “심령의 근심을 뼈를 마르게 한다” 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고기를 많이 쌓아 놓고 먹어 보아도, 심령이 근심하게 되면 뼈가 마른다고 말씀합니다. 화목하지 못한 가정이 얼마나 심각한 건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가정이 화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신을 희생해야 합니다. 희생의 반대말을 이기주의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희생하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요즘의 사회가 왜 그렇게 가정이 무너지는지 생각해 보니까, 이기주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남편도 자기만 생각하고, 아내들도 자기만 생각하다 보니까, 남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희생하는 것 같으면 손해 보는 것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이 깨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가정이 화목하게 되려면, 주님처럼 자신을 희생해야 화목할 수 있습니다.
또 가정이 화목하려면 대화가 단절되면 안됩니다. 대화가 단절되면 그 사람의 고민도 모르고, 사정도 모르고, 마음도 모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대화를 무엇이라고 합니까?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끊어지면 건강한 성도라고 할 수 없듯이, 대화가 없는 가정도 건강한 가정 화목한 가정이 될 수 없습니다.
한 집에 같이 살면서 가장 큰 불행은 대화가 없는 것입니다.
에던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서 내린 벌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과의 대화의 단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우리들의 가정이 화평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가정이 화목해야, 교회가 화목하게 되고, 교회가 화목해야 우리의 영혼이 화목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오늘 하루도, 건강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 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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