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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iblesmith Project by Children – https://www.youtube.com/biblesmith
※ AudioBible:NIV Reading <Day 01-50> Whole in 50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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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dioBible:한글낭독 <01-50일> 성경일독 50일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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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학세미나> 총13강 by 김명현박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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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과학세미나> 총13강 by 이재만선교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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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ation Science Evangelism> Debates \u0026 Seminars by Dr. Kent Hov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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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Animation> Greatest Heroes and Legends \u0026 Greatest Adven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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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한흠목사님:요한복음강해설교 <총63강>
옥한흠목사님:요한복음강해설교 01 주의영광
옥한흠목사님:요한복음강해설교 02 영광보기
옥한흠목사님:요한복음강해설교 03 성령도움
옥한흠목사님:요한복음강해설교 04 예수현실
옥한흠목사님:요한복음강해설교 05 구원방법
옥한흠목사님:요한복음강해설교 06 기도들음
옥한흠목사님:요한복음강해설교 07 기도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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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한흠목사님:요한복음강해설교 09 거듭남뜻
옥한흠목사님:요한복음강해설교 10 거듭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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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연세대학교 채플 설교 [십자가의 은총]
연세대학교 채플 설교(고난주간)(2006.4.13)십자가의 은총누가복음 23:33-43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Source: kmc.or.kr
Date Published: 7/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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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idok.com
Date Published: 6/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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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특별 설교 주의 발자취를 따라 가라(벧전 2:18~25) 정준모 목사 2019년도 고난 주간을 앞두고 베드로 사도가 오늘 날 성도에게 정곡을 …
Source: www.newsp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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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새벽기도회 설교자료 – 다음블로그
2017년 고난주간 새벽기도회 설교자료 고난 주간 예수님의 행적을 중심으로 꾸몃습니다. 월요일 / 마 21:12-17 / 성전 청결 / 찬 303장 12.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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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설교] 십자가 고통을 넘어서 (요 19:17-27) – With 안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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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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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고난 주간 설교
- Author: 성경대장장이프로젝트 : Biblesmith by Child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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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8. 10. 11.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bWaOJh2Fav4
고난주간 연세대학교 채플 설교 [십자가의 은총]
연세대학교 채플 설교(고난주간)(2006.4.13)
십자가의 은총
누가복음 23:33-43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오늘 연세대학교 루스 채플에서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이 자리에는 기독교인도 있지만 아직 교회의 문턱에도 가보지 않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신앙적 풍토의 연세대학교 분위기에 익숙한 분도 있지만, 여전히 낯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번 주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를 지신 고난주간입니다. 교회의 달력으로는 고난주간 목요일인 오늘 12제자와 함께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내일 금요일 정오에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번 성주간이라고 부르며, 가장 엄숙하고 경건하게 지냅니다. 또한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참여할 때 주님의 부활에도 참여하게 될 줄 믿고, 소망합니다.
여러분은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를 잘 알 것입니다. 그는 자화상을 많이 남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렘브란트는 이삭의 희생이나, 돌아온 탕자와 같이 성경을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은 그가 여러 작품 속에 자신의 얼굴을 삽입해 그려 넣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순교자 스데반에게 돌을 던지는 성난 군중 가운데 한사람으로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의 한사람으로 자신을 그려 넣었으며, 또 돌아온 탕자의 모습 속에 자신을 닮은 얼굴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는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나도 거기에 있었어요.” 렘브란트는 자기 그림을 통해 자신의 죄를 변명하고, 자신의 악역을 부끄러워하고, 자신을 구원받아야 할 존재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렘브란트와 함께 그 악역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십자가는 대단히 모순적입니다. 십자가에는 가장 무거운 고난과 함께 또한 영광이 담겨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드러난 고난과 영광이란 모순과 역설은 바로 인간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십자가를 사랑하게 되길 바랍니다.
당시 십자가 처형은 가장 몸서리치는 잔혹한 처형방식이었습니다. 로마 통치자들은 로마시민 아닌 사람과 노예에 대한 처형방법으로 십자가형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후 십자가는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가장 비극적인 십자가가 이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에게는 자랑이요, 찬양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위대한 전도자였던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자기와 기꺼이 화해시켰습니다.”(골 1:20).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은 실토하기를,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갈 6:14)라고 하였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도대체 십자가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신 분이 멸시와 천대 끝에 두 강도의 십자가 사이에서 십자가를 지신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강도와 똑같은 모습으로 십자가형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을 강도 같은 죄인으로 십자가에 처형한 사건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잘못된 판결이요, 가장 큰 인간의 오류였습니다.
강도들의 십자가 사이에 서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대단히 상징적인 의미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강도들보다 더 무거운 온 인류의 죄가 처형되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저주 받은 나무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의 모든 죄를 처리하는 저주받은 자리가 되었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악을 불태우는 쓰레기장과 같은 곳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거룩하고 순결한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만큼은 인류의 모든 죄를 함께 끌어안고, 그 죄 값을 치루는 가장 저주받은 존재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강도들보다 더 무거운 죄를 짊어지고 그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세상에 있었던 어떤 악질적인 죄수보다 더 중한 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감상적인 눈으로 보면서 눈물을 흘릴 것이 아니라, 거기서 소멸되어가는 인간의 죄를 직시하면서 떨림과 두려움으로 그것들을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강도들 사이에 서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내 죄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내 죄가 얼마나 무겁고 중한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고난주간에 예수의 십자가를 진정으로 감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려면 먼저 자신의 죄에 대한 두려움과 깊은 자각이 앞서지 않으면 안됩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강도들의 십자가 가운데 서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큰 구원의 능력이 있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아래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믿겠다고 조롱을 하였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서 구원하는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생각한대로 그리스도 됨이 그런 작은 능력을 나타내는데 있는 것이 아님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됨은 남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포기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무지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무한한 능력의 소유자로만 생각해서 무엇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바로 그 능력의 근원이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는 데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달린 다른 한 강도는 자기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에게 간구 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는 당장, 여기에서 구원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금 자기가 당하고 있는 죽음은 자기의 죄 값으로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강도인 그도 자신의 죄 값을 치루지 않은 채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구원을 간청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강도의 기도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였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다”.
이 약속을 받은 강도는 그 즉시 자신의 고통을 덜거나, 아니면 기적적인 방법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구원은 이 땅에서 어떤 놀라운 기적을 동반하는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희생의 역사임을 알게 됩니다.
초대 교회인 2세기 무렵, 십자가의 효험에 대한 소문이 커졌습니다. 십자가 조각을 갖고 있으면 몸에 병도 낫고, 부자도 되고,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낭설이 급격히 퍼졌습니다. 이런 만사형통 소문 때문에 가짜 십자가 조각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수집되고, 장삿속으로 매매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런 우려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매달리셨다고 주장하는 십자가를 다 모으면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재건할 수 있을 정도이다.”
오늘날에도 십자가의 아픔이나 대속의 신비는 사라진 채, 십자가가 값싼 부적이나 금붙이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바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어리석은 기도를 들어주려고 거기서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이기적인 욕구를 이루어 주기 위해서 그 언덕에 선 것이 아닙니다.
어떤 여학생이 이렇게 기도를 했답니다.
“하나님, 저를 날씬하게 해 주세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아무리 하나님이어도 자기 몸을 날씬하게 만드시기 어려워 보였나 봅니다. 그래서 다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날씬하게 해주시기 어렵거든, 제 친구를 뚱뚱하게 해주세요.”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십자가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지난 해 사순절 기간에 우리 감리교회에서는 선교 120주년을 맞아 ‘세계의 십자가 전’을 연 일이 있습니다. 그 때 주최했던 우리는 깜짝 놀랐습니다. 첫째는 신문과 방송을 막론하고 모든 언론기관이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둘째는 열흘 동안 만 명이 넘는 관람객에 놀랐습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전시된 십자가가 얼마나 다양한지, 민족과 나라에 따라 십자가 형태가 얼마나 고유한지, 십자가를 빚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얼마나 깊이 이해하는 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십자가는 저마다 다른 고난의 질감을 갖고 있습니다. 아픔이 얼마나 위대한 노래를 만들 수 있는지, 고난으로 가득한 슬픔조차 얼마나 진정한 기쁨의 노래를 담고 있는지 십자가를 진정으로 바라보는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에 있는 떼제 공동체는 “아픔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창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마음이 찢어질 때, 곧 상한심령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비로소 최선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를 가리켜 해체의 시대라고 합니다. 중심의 해체가 선언되어 버린 탈중심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삶의 심장부에다 튼튼한 중심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모시기를 주저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스스로 중심을 해체하고, 변두리로, 낮은 곳으로, 그 소외와 곤궁과 비참의 자리로 자신을 이동해 온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신이 영원한 희망이 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에로스는 올라가는 사랑이지만, 아가페는 내려오는 사랑입니다.
에로스는 자신을 격상시키려는 욕망이지만, 아가페는 자신을 내어 던지려는 의지입니다.
예수를 아가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가 내려오는 사랑이고,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어 던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할 수 있다는 약속을 이루기 때문에 큰 능력입니다. 그 십자가는 강도같이 완악한 자라도 즉각적으로 그를 변화시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할 수 있는 능력 때문에 빛나는 것입니다.
저 유명한 시인 박두진 선생은 시‘갈보리’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마지막 내려 덮는 바위 같은 어두움을
어떻게 당신은 버틸 수 있었는가?
또 물 같은 치욕을, 분노 같은 분노를, 에워내는 비애를, 물새 같은 고독을
당신은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는가?
꽝꽝 못을 박고 창끝으로 겨누고 채찍질 해 때리고
입맞추어 배반하고 매어달아 죽이려는
그 원수들을 어떻게 사랑 할 수 있었는가?”
박두진의 외침 ‘어떻게’는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테레사 수녀는 “가장 큰 병은 결핵이나 문둥병이 아니라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빵이 배고픔을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빵 속에 담긴 사랑이 배고픔을 멈추게 하는 법입니다.
오늘 십자가를 바라보는 여러분!
일찍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좌 우 편에는 두 강도가 있었지만, 오늘 우리가 십자가를 향할 때에도 두 가지 방향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향하여 있고, 다른 하나는 세상 앞에 바로 서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은 두 방향의 회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25시>로 유명한 작가 게오르규가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루마니아 정교회의 신부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그는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를 비유로 설명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게오르규는 잠수함을 타는 해군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잠수함에는 토끼장을 필수적으로 싣고 다녔는데, 토끼는 잠수함 안의 산소를 측정하는 일종의 계기 역할을 하였습니다. 게오르규의 임무는 바로 토끼를 지켜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동방교회의 사제로서, 또 문학가로서 자신의 소명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잠수함의 토끼처럼 시대와 역사의 흐름 앞에 민감하여 예언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잠수함 안에서 토끼를 감시하는 병사처럼,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름지기 지식인이라면 이 역사의 파수꾼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우리 시대의 나침반이요, 영원한 구원의 표지판인 십자가로 초대하시길 원합니다. 특히 우리 민족의 미래를 짊어지고, 내일을 열어갈 여러분을 통해 고난 받는 이 민족이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길 기대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 구원의 세상을 이루어 가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예수님의 고난주간 행사
고난 주간(苦難主間, Holy passion week)
주께서 3년간의 공생애 끝에 이제 스스로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기 위하여 나귀를 타시고 군중들의 환호속에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공식 선언하시면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종려 주일로부터 주님이 장사되셨다가 부활하신 부활 주일 직전까지를 절기로 삼아 주의 수난의 노고와 은혜를 경건히 기리는 한 주간의 절기가 바로 고난 주간이다.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이었던 이 고난 주간에는 예루살렘 입성, 성전 숙청, 감람산 강화, 성만찬 제정,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체포와 심문, 십자가 처형과 장사 등 그야말로 예수 공생애의 절정을 이루는 사건이요 전 우주적 사건이기도 했던 대사건들이 숨막히게 전개 되었다. 이에 성도들은 주님의 사역의 모든 것이 응축적으로 담겨 있는 이 주간의 각 요일마다 그 요일에 있었던 사건들을 각각 기억하여 한 주간을 내내 엄숙한 절기로 보내게 된다.
‘고난 주간'(Passion week) 또는 ‘성 고난 주간'(Holy passion week) 등으로 불리는 고난 주간의 원래 명칭은 큰 주간, 즉 하나의 큰 일주일이라는 뜻의 ‘대주간'(Great week)이었다. 이 명칭은 동로마 교회의 고난 주간 행사를 기록한 에게리아(Egeria)의 순례집 속에 언급되어 있으며, 서로마 교회에서도 이 주일을 대주간이라고 불렀다. 로마 교회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이 주간의 공식 명칭으로, 대주간을 의미하는 ‘Hebdomada Magna)’ 또는 ‘Hebdomada Major’ 등을 사용한다. 이러한 ‘대주간’이라는 명치은 12세기에 이미 보편화되어 각종 기독교 전례 문서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한 의로운 인간의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태초부터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세워진 구속(救贖)의 법을 성취하기 위해 구속주가 당하신 전 우주적 고난이었다. 태초에 인간은 선악과를 두고 맺은 언약을 어기고 범죄했다. 그리하여 원래의 규정대로 죽어 영벌을 받아야 했다. 더욱이 하나님은 절대 거룩한 공의(公義)의 하나님이시므로 그분이 세운 법은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랑(Love)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단 사람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공의의 원칙대로 처벌하시면서도 끝없는 사랑으로 죄를 지은 인간 자체에게는 구원받을 새로운 기회까지 주신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을 믿고 회개함으로써 구원을 얻게 되는 법을 궁극적으로 성취하기 위한 대속 희생으로서의 고난이셨던 것이다.
한편 주님은 이런 구속의 법을 가장 처절한 사형수단이었던 십자가(the Cross)위에서 마침내 하나님에게까지 버림받은 영육간의 처절한 고난을 통하여 성취하셨다. 고로 우리는 본래 제 2위 성자 하나님으로서 영광과 주권을 버리고 죄인을 구하기 위하여 수난(the Crucifixion)을 당하신 주님의 사역에 담긴 공의와 사랑을 마음 속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창 3:15; 사 53:1-12).
1. 시기
사순절의 마지막 한 주에 해당하는 고난 주간은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신 종려 주일로부터 시작하여 부활 주일 전까지의 기간 즉, 주일에서부터 토요일까지를 말하다. 대속 사역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고난받으심을 기리는 사순절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께서 대적들에게 잡혀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장사당하신, 성자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절정기인 고난 주간내에는 종려 주일, 세족 목요일, 성 금요일, 성 토요일 등이 포함되어 있다.
희랍정교에서는 종려 주일 다음날인 월요일부터를 고난 주간으로 지키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동,서로마 교회에서는 보편적으로 종려 주일부터를 고난 주간에 포함시켜 기념하고 있다.
2. 유래
사순절은 부활절에 있을 성만찬과 세례식을 준비하기 위한 기간으로 교회 성립 초기부터 행해졌었다(사순절, 2.유래 참조). 고난 주간은 이 사순절 절기 내에 포함된 절기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겪으신 고난을 생각하며 지내는 주간이다.
이러한 고난 주간이 언제부터 지켜지게 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롬 6:3-5, 고전 11:23-26의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는 절기가 초대 교회 때부터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고난 주간이 전교인의 공식적인 절기로 공개적으로 지켜진 것은 A.D.313년 콘스타티누스 대제의 신앙 자유령이 포고된 이후였다.
그 밖에 고난 주간과 관련된 오래된 자료로는 에게리아(Egeria)가 집필한 순례집이 있다. 이는 385년 경의 자료로 다양한 절기와 그 전례의식을 수록하고 있으며, 수난절 기간에 포함된 절기로서의 고난 주간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은 고난 주간을 대주간(大主間)이란 명칭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동로마 교회의 하나임 에루살렘 교회에서는 부활 주일 전인 고난 주간 기간에 종려 주일 행진과 같은 엄숙한 경축 행사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책이 집필될 당시인 4세기까지 어러한 동로마 교회의 풍습은 서로마 교회에는 생소한 것이었으나, 5세기 이후에 서방 교회에도 유입되기 시작했다.
고난 주간의 금식은 동,서방 교회에서 모두 행해졌는데, 고난 주간의 금식은 다른 절기 때의 금식보다 더 엄격하게 행해졌다. 그러나 사순절에서도 이미 언급된 바 있듯이 금식 기간과 정도는 교회마다 일정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일주일 내내 금식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4일이나 3일 혹은 성 금요일과 성 토요일 2일만 금식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밖에도 고난 주간에는 철야 기도회, 세족식과 성만찬등 많은 기념 행사들이 진행되었다. 또한 인간적 유희를 목적으로 한 모든 오락이 금지되었다(사순절, 2. 유래 참조).
중세에 있어 고난 주간의 금식을 비롯한 여러 의식들은 교회의 중요한 행사로 여겨졌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은 이러한 의식들은 형식화되어 그 본래의 의미에 대해서는 소홀해졌다. 이러한 연유로 1517년 루터의 종교 개혁 후 많은 형식적인 종교 행사들이 폐지되었는데, 이때 고난 주간의 많은 행사들도 축소, 혹은 폐지되었다. 이는 루터가 카톨릭 교회에 몸담고 있을 당시 깨달은 교회 의식과 관련된 많은 악영향을 근절하기 위한 조처의 하나였다. 이러한 의식의 축소화, 또는 폐지로 인해 루터가 살았던 비텐베르그에서는 일찍부터 고난 주간과 관련된 풍습이 사라졌었다. 그러나 예식에 대한 단호한 폐지와 축소에도 불구하고 종교 개혁 후 20여년간은 고난 주간 행사가 통일되지 않은 여러 형태로 계속 지켜졌다.
한편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이 고난 주간 절기를 지키고 있기는 하지만 과거의 고난 주간 의식은 거의 행하지 않고 있다. 단지 몇몇 교파에서 성 금요일에 특별 예배 등을 드리고 있을 뿐이다.
3. 고난 주간 각 요일의 특기사항
(1) 종려 주일(Paim Sunday)
종려 주일 항목을 참조하라.
(2) 월요일부터 수요일
고난 주간의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은 특별 집회의 형식으로 모였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고난 주간 화요일에 철야 집회를 갖는데, 이때 주교는 감람산에 올라가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마 24:4이하의 성경을 낭독하기도 하였다. 또한 수요일에는 마 26:14-16의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부분의 말씀이 낭독되었으며, 이때 회중은 큰소리로 회개의 기도를 드린다. 한편 로마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앞둔 이날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리는 엄숙한 미사를 드렸다.
(3) 세족 목요일(Maundy Thursday)
세족 목요일(Maundy Thursday)의 Maundy는 율법을 뜻하는 라틴어 Mandatum에서 말로, 수난을 당하기 전 목요일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심을 기념하는 데서 유래하였다(요 13:24). 또한 세족 목요일은 ‘성 목요일'(Holy Thursday) 또는 ‘녹 목요일'(Green Thursday)이라고도 불린다. 녹 목요일이란 명칭은 독일에서 불리워지는 것인데 그 유래가 확실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성 목요일에 병마를 막기 위해 먹었던 녹색의 약초나 이날 미사때 사용되었던 파라먼트(parament)의 색을 지칭하던 데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이날에는 과거 예수께서 12명의 제자들과 마가의 다락방에서 드셨던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여 성만찬이 행해진다. 그리고 이날은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것처럼 자기 죄를 회개한 사람들의 발을 씻기는 예식을 행하는 것은 회중이 회개한 자와 화해함으로써 그들을 받아 들인다는 의미로, 이 관습 역시 동로마 교회로부터 유래된 것이었다. 또한 이날 밤은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 같이 될 정도로 기도하며 다음날 있게 될 십자가 지심을 대비했던 것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렸다. 이밖에도 중세 교회에서는 이날 성유(聖油)의 축성의식 등이 거행되었다.
(4) 성 금요일(Holy Friday)
성 금요일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신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죄인들의 죄값을 대신 치루어 주시고 인간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신 날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슬픈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 인간을 위한 구속 사역을 성취하셨다는 의미에서 이날을 Good Friday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날은 역시 모든 성도들에게 슬픈 날임에 틀림없다. 즉 성 금요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을 기리는 날이기 때문에 새벽부터 밤까지 애도의 시간을 가졌다. 또 이날에는 가장 엄격한 금식과 철야가 행하여 졌으며, 교회의 집회도 가능한 한 제한 되었다.
3세기 중엽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성 금요일과 성 토요일에 금식이 행해졌고, 7세기 스페인의 일부 지방에서는 성 금요일에 아예 교회 문을 열지 않았으며, 성도들은 이날 철저히 기도에만 전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교회들은 이날 성경 낭독, 중보 기도, 십자가의 베일 벗기기, 찬양 등의 내용으로 간소화된 예배 형식의 애도 예식을 거행했다. 또한 중세에는 이날 엄숙한 장례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5) 성 토요일(Holy Saturday)
대 안식일, 즉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머무셨던 동안인 성 토요일은 성 금요일보다도 더 엄숙한 날로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 경건한 분위기 아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이 기념되었다. 따라서 이날은 교회력 가운데 가장 엄격한 금식의 날이기도 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날 새로운 불, 부활절 촛불, 물 등을 성별하는 의식과 참회와 애도의 미사가 드려졌다.
4. 풍습
고난 주간은 사순절 기간 중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준비하는 기간과 죽으심 그리고 무덤에 머물러 계신 기간을 기념하는 절기이기 때문에 엄숙한 가운데서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이 기간 동안에는 금식과 기도가 행해졌으며, 일정한 규울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제하여 난잡한 행동과 현란한 옷차림을 삼가하였다. 그리고 중세 시대에는 세속적인 연극, 음악회 등의 공개적인 오락 행사들이 금지되었고, 공공 기관도 휴무하였다. 또한 죄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기억하며 죄인들을 방면하였다. 또한 이 기간 동안 노예들은 여러 면에서 유리한 대우를 받았으며 특별히 해방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듯 종교 개혁 이전까지만 해도 다양한 고난 주간 행사를 가졌으며 풍습이 행해졌었다. 그러나 종교 개혁 이후 고난 주간과 관련한 행사들이 폐지 또는 간소화되면서 그 풍습들도 많이 자취를 감추었다. 여기서는 대표적인 것만 살펴보기로 한다(3. 각요일의 특징 참조).
(1) 고난 주간 철야제
고난 주간의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에는 특별 예배의 한 형태로 철야제가 거행됐다. 이때는 제자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가룟 유다의 배반 사화(史話)등이 낭독되었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한편 바로 자신이 죄인임을 큰소리로 자복하며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말씀을 통해 자신을 살피고 새로운 각오를 다짐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이러한 의식은 희랍 정교회에서 아직까지도 고난 주간의 주요 행사로 행해지고 있다.
(2) 성만찬 의식
성만찬 의식 때 사용되는 떡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던 그리스도의 몸을, 포도주는 그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 의식은 그리스도의 피흘림을 통한 성도의 깨끗케 됨을 의미한다. 이에 교회에서는 거룩함을 입은 자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심을 기념하는 성 금요일을 예비하는 성 목요일에 성찬식을 행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드심을 기념하여 성 목요일에 성찬식을 행하는 풍습은 동로마 교회 전역으로 확대되었으며, 5세기에는 아프리카에서도 행해졌다고 한다.
(3) 세족 의식
이 풍습은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 의해 팔리시기 직전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동로마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원래 이 의식은 봉사와 화해를 의미하는 것으로 대성당과 대수도원 교회에서 먼저 행하여졌으나, 후에 로마 교황 피우스12세에 의해 모든 교회에 추천되어졌다. 로마 교회의 세족의식은 미사 집행자가 그에게로 인도된 그리스도의 12제자를 상징하는 12명의 발을 씻기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중세 교회처럼 엄숙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세족 의식을 행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섬기는 종으로 오심을 기념하는 교회가 많이 있다.
5. 주요 행사
(1) 고난 주간 기도회
고난 주간 기도회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나 인간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생애를, 특별히 고난 주간 동안 당하신 그리스도의 수난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갖는 기도 모임이다. 그리스도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나 인간의 몸을 입으셨을 뿐 아니라,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데까지도 철저히 순종하셨다. 기도회는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모든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함께 모여 기도하기 힘든 경우, 기도 시간을 약속하여 서로 다른 장소에서 기도회에 참여하게 할 수도 있다.
주일 학교의 경우, 주임이 쓰셨던 가시관 등 고난 주간과 과련 자료를 어린이들에게 보여 주며 주님의 고통과 구속 사역에 대해 설멍한 후 기도회에 동참할 수 있도록 인도하기도 한다.
(2) 성찬식
고난 주간 성 목요일에는 성찬식이 행해진다. 이때 나누어지는 떡은 우리를 위해 찢기셨던 그리스도의 몸을, 포도주는 그가 십자게에서 흘린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는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신 주님의 희생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성만찬에 참여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자로서 자신을 살피며, 주 안애서의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에 대해 대시 한번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갖도록 한다.
(3) 세족식
제자들이 잠시 후면 당신을 배반할 것을 아시면서도 친히 그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서로의 발을 씻어 주는 세족식을 세족 목요일 즉, 성 목요일에 행한다. 이는 선생님이 제자의 발을 남편이 아내의 발을 씻어 주며 서로가 섬기며 봉사하는 삶에 대해 묵상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의식이라 할 수 있다.
(4) 가정 금식 예배
고난 주간내에는 가정 예배 시간 중에 예수의 고난에 대한 성경말씀을 읽도록 한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고난을 명상함으로써 예수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로 삼으며 특별히 기도하는 시간을 더욱 늘리도록 한다. 이때 가족 전체가 금식을 계획하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을 가지고 정성으로 실천한다. 그 방법으로는 하루 한끼의 음식을 절제할 수도 있고, 한끼를 아주 간단하고 값싼 음식으로 먹을 수도 있다. 또한 고난 주간 동안 불필요한 음식을 삼감으로 모인 돈을, 가족 전체의 특별 헌금으로 드릴 수도 있겠다.
(5) 고난 주간 음악 예배
기도문이나 성경을 음악에 맞추어 낭송하는 것은 이미 히브리 민족의 회당 예배에서도 행해졌었다. 그러나 고난 주간 예배에서 이러한 형태가 도입된 것은 로마 예전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즉 다잇의 로마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록한 복음서를 음율을 가미하여 낭송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음악 예배가 보다 발전적인 형태를 띄기 시작한 것은 12세기경 3명의 사제가 그 역에 따라 테너, 바리톤, 베이스, 등으로 수난 기사를 노래한 것으로, 이것이 수난고의 기원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로마 카톨릭 교회와 성공회에서는 이처럼 각자의 역을 나누어 노래하거나 수난 가사를 낭송하기도 한다.
교회에서 소그룹이나 전교회적으로 드릴 수 있는 고난 주간 음악 예배는 고난 주간 중의 예수님의 행적과 수난사를 입체 낭독하며 사이사이에 관련 찬송을 부름으로써 간단하게 꾸며 볼 수도 있다.
(6) 촛불 예배
촛불 예배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성 금요일을 즈음해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에 행할 수 있는 특별 예배 프로그램이다. 이는 예수님의 가상 칠언에 기초한 셩경 말씀을 읽고 그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드리는 예배이다. 이때 사회자는 예배 전에 8개의 촛불을 준비해 가상 칠언의 성경 봉독과 찬송이 끝날 때마다 촛불을 하나씩 끈다. 그러면 맨 마지남에 촛불 하나만이 남게 되는데, 이것은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암시하는 의미를 가진다. 또한 이 예배에서의 어둥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이땅을 덮었던 어둠을 상징한다.
(7) 가상 칠언(架上七言) 묵상 예배
인간의 구원 사역을 위해 이땅에 오신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6시간 동안 참기 어려운 고난을 받으시면서 우언과도 같은 가상 칠언을 남기셨다. 이 가상 칠언을 묵상하는 가운데 십자가 상에서 당하신 주님의 그 고난을 깊이 생각하면서 겸허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도록 한다. 묵상 예배의 형식에 대해서는 ‘부활절 주요 행사’를 참조하라.
가상 칠언은 눅 23:28, 23:43; 요 19:26,27; 19:28; 마 27:46; 눅 23:46; 요 19:30에 기록되어 있다. 예배를 통하지 않더라도 고난 주간 동안에 개인적으로 이 말씀들을 묵상하도록 해야 한다.
(8) 기타
이밖에도 고난 주간에는 특별 예배와 전도 집회, 절식 형식의 금식 기도회 등이 행해진다. 이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하신 7가지의 말씀을 찾아 묵상하는 시간과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부터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의 고행의 여정을 되새기기 위한 성극등을 공연하면 좋을 것이다.
6. 관련 성경 자료
(1)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묘사
침밷음을 당하심(마 26:67)
채찍에 맞으심(마 27:26)
옷벗기우심을 당하심(요 19:23,24)
멸시를 당하심(막 15:29-30)
비웃음을 당하심(마 9:24)
귀신 들렸다함(요 10:20)
행악자라 불리움(요 18:30,31)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거절당하심(마 27:16-21)
가시관을 쓰심(마 27:29)
강도와 함께 못박히심(요 19:18)
(2) 그리스도의 고난의 목적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을 위함(롬 5:1-21)
죄사함으로 새 피조물이 되게 함(마 26:28)
구속받은 자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함(벧전 3:18)
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함(빌 3:10)
완전한 상태에서 영생하게 함(계 21:3,4)
(3) 그리스도의 고난의 성격
출생부터 죽음까지 전생애의 수난(마 27:46)
영육간의 전인적 수난(히 5:7)
사단의 시험으로 인한 수난(마 4:1-3)
신적 계획에 의한 수난(창 3:19)
신적 진노에 의한 수난(롬 5:8)
수치와 저주로 인한 수난(갈 3:13)
인간을 대신하여 받은 수난(롬 4:25)
(4)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사도들의 증거
우리를 위한 고난이었음(고후 1:5)
죽기까지 순종하심(빌 2:10)
인간과 같이 시험을 받으심(히 4:15)
묵묵히 고난을 받으심(벧전 2:23)
의인으로 불의한 자를 대신함(벧전 3:18)
(5) 고난 주간 동안의 예수의 행적
일요일 – 예루살렘 성 입성(마 21:1-11)
월요일 – 무화과 나무 저주 및 성전 숙청(막 11:12-18)
화요일 – 메시야 논쟁 및 종말 강론(마 21:23-25,46)
수요일 – 기록 없음
목요일 – 최후의 만찬 및 겟세마네 기도(마 26:17-46)
금요일 – 십자가에서 죽으심(마 27:1-61
토요일 – 무덤에 머무심(마 27:57-66)
일요일 – 부활하심(마 28:1-15)
(6) 성찬의 의미
예수님과의 일치된 관계를 나타냄(눅 24:30)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짐(눅 22:19,20)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함(고전 11:26)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함(마 26:29
(7)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의 특징
마음의 짐을 토로하심(마 26:38)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심(마 26:39)
자신의 뜻을 내세우지 않으심(마 26:39)
확신을 위해 거듭 기도하심(마 26:39-44)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며 구하심(마 26:42)
자신을 낮추며 겸손히 구하심(막 14:35)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며 기도하심(막 14:36)
혼자 외로이 기도하심(눅 22:41)
힘써 간절히 기도하심(눅 22:44)
하나님께 기도 응답받으심(눅 22:43)
(8) 예수의 재판 순서
안나스의 예비 심문(요 18:12-14)
산헤드린 공회에서의 비공식 재판(마 26:57-68)
산헤드린 공회에서?공식 재판(마 27:1,2)
빌라도의 1차 심문(마 27:11-14)
헤롯 안티파스의 심문(눅 23:8-12)
빌라도의 2차 심문 및 최종 판결(마 27:15-26)
(9) 그리스도의 가상 칠언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24)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27)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내가 목마르다(요 19:28)
다 이루었다(요 19:30)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10)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후의 사건들
지진과 성전 휘장이 찢어짐(마 27:51)
무덤이 열림(마 27:52)
백부장의 신앙 고백(마 27:54)
무리들이 뉘우침(눅 23:48)
강도들의 다리를 꺽음(요 19:38-42))
예수의 옆구리를 찌름(요 19:34)
무덤에 장사함(요 19:38-42)
무덤을 봉하고 파숫꾼을 세움(마 27:66)
(11)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
대속의 죽으심(롬 4:25)
옛사람을 멸함(롬 6:6)
사단의 권세를 이기심(히 2:14,15)
세상을 십자가에 못박은 죽음(갈 6:14)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만든 죽음(히 10:19,20)
많은 생명을 낳기 위한 죽음(요 12:24,25)
성도들의 옛사람을 못박은 죽음(갈 2:20)
(12) 예수가 이 땅에 오신 목적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마 1:21)
성령과 불로 세례 주시기 위함(마 3:11,12)
율법을 완전케 하시기 위함(마 5:17)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함(마 9:10-13)
하나님 아버지를 세상에 알리기 위함(마 11:27)
이방인들에게까지 구원과 심판을 알리시기 위함(마 12:18)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시기 위함(마 16:18)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함(마 20:28)
새 언약을 세우시기 위함(마 26:28)
(13) 고난 주간에 임하는 성도의 자세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함(빌 4:14)
자신의 죄를 깨달음(욥 36:8,9)
겸손하게 회개함(벧전 5:5)
자신의 고난을 인내함(살전 3:3)
절제하는 생활을 함(고전 9:25)
말씀을 깊이 묵상함(시 1:1,2)
경건한 생활이 되도록 힘씀(딤전 4:7)
(14) 예수를 쫓는 자가 본받아야 할 그리스도의 성품
그리스도의 이타심(막 10:45)
그리스도의 부모에 대한 순종(눅 2:51)
그리스도의 성도에 대한 사랑(요 13:34)
그리스도의 영성과 거룩(요 17:19)
그리스도의 원수에 대한 사랑(롬 5:10)
그리스도의 겸손과 자기 부인(否認, 고후 8:9; 빌 2:7)
그리스도의 성부께 대한 순종(빌 2:8)
그리스도의 순결과 인내와 온전하심(히 4:15; 12:2)
(15) 성도의 고난의 목적
겸손하게 함(신 8:3,16)
죄를 깨닫게 함(욥 36:8,9)
하나님을 찾게 함(시 78:31-34)
말씀을 깨달음(시 119:71)
주의 사랑의 확증이 됨(잠 3:11,12)
진실을 시험하기 위함(잠언 17:3)
기도하도록 함(사 19:20,22)
성화의 과정임(시 66:10
하나님 곁에 있게 함(겔 14:11)
정죄를 당치 않게 함(고전 11:32)
주의 능력을 알게 함(고후 4:8-11)
주의 고난에 동참케 함(빌 3:10)
순종을 알게 함(빌 2:5-8)
평강의 열매를 맺음(히 12:10,11)
상급 받을 기회가 됨(약 1:12)
믿음이 연단됨(벧전 1:7)
은헤를 더 받게 됨(벧전 5:9,10)
마침내 천국에 이르게 함(마 10:22)
(16) 성도가 기뻐해야 할 고난
의를 이루기 위하여 받는 고난(베전 3:14)
교회를 위하여 받는 고난(골 1:24)
복음을 위하여 받는 고난(딤후 1:8)
연단을 위하여 받는 고난(살전 3:3)
영광을 얻기 위하여 받는 고난(롬 8:17)
7. 고난 주간 기념 예배 설교 자료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마 26:69-75)
베드로는 주님의 제자 중 열심있는 수제자로, 예수께서 제자들의 배신을 예언하실 때도 자신만은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 장담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도 예수님을 부인했을 뿐 아니라 저주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를 통해 우리 성도들이 알아야 할 교훈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① 우리는 약한 자입니다(롬 5:6) – 우리에게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능력과 열심히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의 능력만을 의지하고 승리의 주님, 도우시는 성령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라도 또다시 넘어질 수밖에 없는 약한 자들인 것입니다.
② 소망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넘어집니다(롬 8:24,25) – 우리가 복음을 인하여 핍박과 환난을 받지만 기쁭으로 인내하여 견디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질 천국에 대한 소망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대한 소망과 확신이 없다면 이 세상을 살아 나가는 도안 겪게 될 수많은 고난에 우리는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③ 실패해도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고후 12:9,10) –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 가운데는 크고 작은 실패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우리 자신들보다도 이 사실을 더 절 아십니다. 베드로도 주님을 부인함으로 실패자가 되었지만, 다시 회개하고 일어나 사도직을 잘 감당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실패의 아픔을 딛고 일어나는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최후의 승리자가 됩니다.
주님을 향해 가다 육신의 연약함을 인해 넘어졌습니까? 그렇다면 그 나약한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그러면 승리의 주님이 연약한 당신을 이끌어 승리하는 삶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영원한 실패자 가룟 유다(마 27:3-8)
가룟 유다는 영광스런 주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은 삼십에 팔아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게 했습니다. 결국 이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목매달아 죽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유다의 죽음은 어떤 것이었는지 살펴봄으로 주의 제자로서의 우리의 자세를 바르게 합시다.
① 육신이 비참하게 주었습니다(5절) – 주님을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시게 한 가룟 유다는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스스로 목매달아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팔아 얻은 은 삼십은 그가 죽은 후 그의 묘지를 사는데 쓰여졌습니다. 때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 잡는 세상적인 욕심의 결국은 이처럼 허무한 것입니다.
② 명예가 죽었습니다(6-8절) –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욕된 이름은 그의 명예를 죽일 뿐입니다. 기룟 유다의 이름은 그의 죄악된 행동으로 인해 2000년이 지난 지금은 물론 영원히 저주의 대명사로 불려질 것입니다.
③ 영혼이 죽었습니다(약 1:15) –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의 죄는 진정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주님은 그가 돌이켜 주님 앞에 회개했다면 그를 용서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돌이키지도,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죽음을 택했을 뿐입니다. 이에 그의 영혼은 영원한 지옥불에 던져지고 말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결국 잠시 세상의 달콤한 유혹을 따라가다 돌이키지도 못할 인생의 영원한 실패자로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주님을 잘 따라 왔습니다. 앞으로도 주님만을 바라보며 따라갑시다. 혹 세상적인 유혹으로 인해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의 노선에서 잠시 빗나갔을지라도 즉시 회개하고 돌아옵시다. 승리의 삶을 주시는 주님께로.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사 53:4-6)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피조물의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서 고난을 받으시며,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도리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고난 주간을 맞이해 이땅에 오신 주님이 당하신 고난은 어떤 것이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① 고난 받은 예수님(4절) – 예수님은 아무 흠도 없는 거룩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의 백성들의 더러운 죄로 인해 조롱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육체적인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② 버림 받은 예수님(5절) – 죄인인 인간들을 사랑하셨기에 고난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인간들은 오히려 욕하며 배척했습니다. 똫나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마저 주님을 버리고 도망감으로 처절한 배반을 경험하셨습니다.
③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6절) – 죽음은 범죄로 인한 심판입니다. 그런데 아무 흠도, 죄도 없는 깨끗한 주님께서 하나님께 버림받는 죽음의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주님은 2000년전에 하나님의 종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대속의 사역을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이 대속의 십자가 죽음의 사역을 믿기만 하면 모든 자들이 다 영생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주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온전히 살지 못한다면 주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경험한 전화 위복(행 9:4; 고후 12:7; 빌 1:13)
예수님은 외롭고 고통스러운 십자가 사역을 마치신 후에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때로 성도에게 고난을 허락하시고 고난의 과정을 통해 당신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자신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짐을 보고 감사했던 바울을 통해 고난을 주시는 깊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① 소경됨을 인해 영적 눈을 떳습니다(행 9:4) – 주님을 핍박하던 사울이 하나님의 섭리하심으로 잠시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암울함 속에서 그는 오히려 빛이신 그리스도를 발견했습니다. 육체의 한 지체를 잃음으로 그는 영혼을 얻었습니다.
② 육체의 가시로 겸손을 배웠습니다(고후 12:7) – 하나님은 바울에게 육체의 아픔과 고통을 허락하셨습니다. 바울은 육신의 연약함을 통해 자신의 무능함과 크신 하나님의 권능을 깨달았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한 삶의 자세를 배웠습니다.
③ 감옥에 갇힘이 전도의 기회가 되었습니다(빌 1:13) –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는 바울이 옥에 갇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잠시 잠깐 복음이 막히는 듯했으나, 이는 또다른 복음 증거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감옥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는 바울로 인해 많은 사람이 영혼의 해방을 얻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예기치 않은 고난이 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 가운데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감추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살펴 고난 중에도 감사하며 인내함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는 성도가 됩시다.
[이사야 53장 고난 주간 설교말씀] “나를 위해 고난당하신 예수님”(사5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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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오늘도 복음 빵집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오늘은 이사야 53장 고난 주간 설교말씀 중에서 고난 주간에 활용할 수 있는 설교 자료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십자가에 고난 받을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면서 고난 주간에 묵상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나를 위해 고난당하신 예수님”(사53:1-6)
♣명제: 예수님의 고난은 선택된 백성들을 위해 고난당하셨다.
♣목적: 예수님의 고난이 나의 고난이 될 때에 구원이 이루어진다.
오늘은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며 왜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셨는지를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없었다면 지금 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죽었던 내가 살아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 때문에 죽었습니다. 죄와 사망에서 전혀 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고 찔림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가 살아난 것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나를 위해 고통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그분만을 높이고 찬송하며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고난당하신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여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 53: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이사야 선지자는 500년 후에 나타나실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광도 받으시는 만왕의 왕이지만 함께 고난당하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없이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이 살아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었느냐’ אמן(아만 539) 확실하게 하다, 지지하다, 충실하다, 믿다, 라는 뜻입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하여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믿는 사람은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주신 사람만 믿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마음에 확실하게 하시고 믿게 하셔서 하나님께 충성되게 신앙생활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마음에 확신을 주고 외부의 환경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통하여 개인적으로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바로 믿음은 내가 행위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나도 주님의 은혜로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사야 선지자는 미래에 오실 예수님을 예언하면서 예수님이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와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서 사람들이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나도 이렇게 예수님을 보았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정말 놀라울 따름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ראה(라아 7200) 보다, 바라보다, 주목하다, 라는 뜻입니다. 바로 내가 예수님을 볼 때에 아무 흠모할 만한 것도 없이 바라보며 주목했지만 구원받을 만할 정도로 의로운 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복음을 무시할 때가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가 이런 삶을 세상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주님을 끝까지 거부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 이곳에서 주님을 위해 예배드리는 생명의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고난당하시고 죽으셨기 때문에 내가 죄에서 살아난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인생을 새롭게 바꾸어 놓게 되었습니다. 나는 죄악에서 살아날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영원히 죽었던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이시고 나를 살리신 것입니다.
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께서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셨는데 엄청난 고통을 당하시고 간고를 많이 겪었습니다. 사람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고통과 고난을 아시고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멸시를 받아’ בזה(바자 959) 멸시하다, 싫어하다, 경멸하다, 업신여기다, 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멸시당하시고 경멸당하여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바로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의 군병이 예수님을 채찍으로 때리고 침을 뱉어 멸시하고 업신여겼습니다. 이런 멸시를 받았는데도 예수님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으시고 그 경멸을 모두 받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나를 위한 경멸입니다. 내가 죄 때문에 경멸당하고 무시당해야 될 것을 예수님이 대신 받아주신 것입니다. 또한 나도 이렇게 예수님을 무시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구원해 주신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또한 얼마나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까? 오늘 이 시간 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자녀가 되었으며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질고를’ חלי(홀리 2483) 병들다, 약하여지다, 쇠약하다, 슬퍼하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질고를 아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내가 육체적으로 병들고 영적으로 힘들어 슬퍼할 때에도 주님은 모두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해 마음에 근심하고 쇠약해져 죽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에도 주님은 나와 함께 하셔서 나의 질고를 모두 거두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주님께서 먼저 질고를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무거운 육체적인 질고와 영적인 고통을 모두 당하신 분이기 때문에 나의 모든 쇠약한 것들을 알고 슬퍼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나의 모든 질고를 주님께서 알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께 맡기며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모든 질고를 당하시고 버림받으시고 많은 고통과 고난을 당하셨는데도 나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을 버리고 모욕하며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을 때도 많았고 주님을 배반하여 돌아갈 때도 있었으며 나의 구주로 고백하지 않고 세상에서 살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를 아시고 나의 모든 질병과 고통을 거두어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위로를 받으려고 하면 마음에 시험이 올 때가 있습니다. 나는 이제 주님께 위로받고 나의 고통과 고난을 주님께 고백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사야 선지자는 말씀합니다. 주님은 나의 질고와 나의 슬픔을 모두 당하신 분인데 나는 생각하기를 예수님 자체가 죄가 있어서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생각대로 판단을 합니다. 주님의 고난은 나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은 죄가 없고 자신은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당하였거늘’ סבל(사발 5445) 담당하다, 메다, 싣다, 들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모든 육체의 질병과 영적인 고통을 주님이 직접 담당하시고 자신의 육체에 실어서 나의 질병을 멀리 떠나게 하시고 메어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를 완전하게 치료해 주신 분입니다. 나의 슬픔을 주님이 직접 담당하셨는데 고작 나는 생각한다는 것이 주님이 징벌을 받은 이유는 바로 자신의 죄 때문에 그랬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입니까? 이런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고난주간을 통해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고통을 당하셨어도 완전하고 완벽하게 십자가에 당하시고 바로 나를 개인적으로 구원해 주신 분입니다.
‘맞으며’ נכה(나카 5221) 맞아죽다, 찔러 넣다, 채찍질하다, 죽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맞으셨는데 로마 군병들에 의해 채찍으로 맞으셨습니다. 이 채찍은 끝에 쇠와 뾰쪽한 동물의 뼈를 달아 만들었는데 이 채찍에 맞으면 살이 떨어져 나가는 엄청난 고통이 있습니다. 이렇게 채찍을 맞으시므로 온 몸은 살이 찢겨나가고 피가 범벅이 되어 맞아서 죽도록 때린 것입니다.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군병들에 의해 옆구리에 창을 찔리시기까지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나 때문에 이런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바로 나의 죄 때문에 주님이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렇게 주님이 고난을 당하시고 채찍을 맞는 것이 하나님께서 직접 예정하시고 지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고난을 당 한다’ ענה(아나 6031) 괴로워하다, 욕보이다, 학대받다, 벌 받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는데 육체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고통을 당하십니다.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고통입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은 너무나 괴로워하셨습니다. 그리고 육체의 고통입니다. 로마 군병들이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에게 침 뱉고 십자가에서 실오라기 하나 입지 않으시고 수치를 당하신 것이 너무나 큰 고통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명예와 수치가 가장 큰 가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하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이 모든 고통을 생각할 때에 내가 받은 고통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너무나 참기 힘든 고통입니다. 욕보임을 당하고 고통당하는 것이 얼마나 큰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고통을 모두 참아내셨습니다. 바로 나 때문에 참으신 것입니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의 찔림은 나의 허물 때문이고 예수님이 상함은 나의 죄악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징계를 받으므로 나는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채찍을 맞으므로 나음을 입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찔림은 어떤 찔림일까요?
‘찔림은’ חלל(할랄 2490) 구멍을 내다, 꿰뚫다, 관통하다, 더럽힘을 받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찔림은 어느 누구나 찔리는 그런 찔림이 아닙니다. 나의 손에 전동드릴을 가지고 구멍을 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너무 끔찍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내어주시면서 손과 발에 30Cm 대못을 박힘으로 구멍이 나셨고 완전히 관통하여 꿰뚫리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렇게 더럽힘을 당하시고 나에게 깨끗한 의로움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셨는데 온 몸에 여러 개의 큰 드릴이 뚫고 있다고 상상해 보시면 나 때문에 고난당하신 예수님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나는 손톱 밑에 가시만 박혀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그 가시를 빼야만 되는데 예수님은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셨겠습니까? 이 찔림은 바로 나의 원죄 때문이라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상함은’ דכא(다카 1792) 잘게 부수다, 분쇄하다, 깨어지다, 꺾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육체의 상함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상함입니다. 고기를 잘게 부수는 기계에 들어가서 고기가 분쇄되어 나오듯이 예수님의 육체의 상함이 바로 이와 같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마어마한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육체는 완전히 깨어지고 분쇄되어 모든 뼈마디가 꺾일 정도로 고통을 당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 상함은 바로 나의 자범죄 때문에 이런 고통을 당하신 것이며 예수님의 육체가 갈기갈기 찢어진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예수님 때문에 원죄와 자범죄에서 해방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내가 어떻게 죄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까? 그 누구도 나 대신 목숨을 바쳐 사망에서 생명으로 구원시켜 줄자는 없습니다. 바로 예수님 외에는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습니다.
바로 이 분 때문에 내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예수님의 징계 때문에 내가 바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영원히 생명을 얻게 되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을 반드시 기억하시고 다시는 죄악 가운데 살지 않으며 죄를 생각하지도 않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런데 나는 이런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생명의 삶이 아닌 죽음의 삶을 살면서 예수님을 비난하며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외아들 예수님께 나의 모든 죄를 담당시키셨습니다.
‘담당시키셨도다’ פגע(파가 6293) 만나다, 구하다, 죽이다, 강권하다, 중재자,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죽음의 길로 갔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시고 나를 강권적으로 세상에서 빼내 주셔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으며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가 되어 주셔서 죄인이었던 내가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시는 중재자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을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직접 십자가에 죽이시기로 작정하시고 나를 위해 죽이셨는데 바로 완전하게 죽이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완전하게 죽이지 않으면 선택된 백성들을 구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개인적으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의 피 흘림이 없이는 절대 죄에서 해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계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예수님의 피가 나의 죄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나의 원죄와 자범죄를 모두 해방시켜 주시고 천국을 바라보는 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나는 당당하게 나갈 수가 있습니다. 이제 나는 죄인의 신분이 아니라 의인의 신분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이 시간 고난 주일을 맞이하여 주님의 고통이 얼마나 크셨는지를 깨닫고 나의 죄가 이 정도로 많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을 인생인데 내가 죽는다고 해서 구원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나 대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바로 주님의 놀라운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 이 시간 확실히 알고 신앙생활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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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일의 설교] 고난주간과 부활절, 우리는 무엇을 소망하는가 (롬 8:24~25)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4~25)
강송중 목사(서울남교회)
2022년의 고난주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오는 금요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금요일입니다. 십자가 죽음은 처절한 죽음이었습니다. 몸과 마음과 영혼까지 모든 영역에서 성육신 하신 인간의 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극심한 고통을 감당하셨습니다. 죄 없으신 그분께서 누구를 위하여, 누구 때문에 이런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는지요?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 능력을 조금이라도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 고난주간을 결코 무심하게 지나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나를 위한 주님의 십자가! 이것이 고난주간의 의미입니다.
독일의 신학자요 역사학자인 마르틴 행겔(Margin Gengel, 1926~2009)이 쓴 <십자가 처형>이라는 책에서, 그는 고대 로마사회와 헬레니즘 문화 속에서의 십자가 처형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당시 역사적인 일차 사료들을 기반으로 자세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이렇게 세 단어로 요약합니다. ‘극도로 처참한 십자가 죽음.’ 십자가 처형이 더이상 처참할 수 없는 가장 극심한 고통임을 단 세 단어로 요약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코로나19의 긴 터널에서 끝이 보이고 있습니다. 언론에서는 방역당국의 2022년 4월 17일까지 유효한 사회적 거리두기 방역지침도 어쩌면 마지막 방역조치일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전망하기도 합니다. 부활절 이후에는 마스크 착용을 실내에서만 하게 되고, 모든 시민들은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일상회복의 소망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어느 한 목사님의 책에서 2014년 오엠 국제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둘로스호가 필리핀에 방문했을 때의 한 사건을 기록한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한 극단적인 이슬람 청년이 둘로스호에 수류탄을 투척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스웨덴에서 파송된 소피아라는 20대 전후 젊은 자매와 뉴질랜드에서 온 카렌이라는 비슷한 연령의 자매가 사망하고 32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선교회는 즉시 사망한 두 사람의 부모에게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부모님들은 선교회로 전보를 보냈습니다. “우리는 이 비참한 일에 대해 잘 대처하고 있습니다.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일을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이 사건을 기록한 목사님은 아마 그 전보를 직접 본 것 같았습니다.
자녀의 죽음보다 더 비극적인 사건이 있을까요? 그런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용기와 위로와 소망의 글을 보낼 수 있었을까요? 꽃다운 젊은 나이에 선교에 헌신하고 있는 자랑스럽고 사랑스런 딸을 불의의 사고로 먼저 주님의 곁으로 보내고도 저토록 견고하게,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며 권면할 수가 있었을까요?
한 찬송가를 소개합니다.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무섭게 바람 부는 밤 물결이 높이 설렐 때 우리 주 크신 은혜에 소망의 닻을 주리라.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찬송가 488장)
우리의 소망이 무엇인지요? 우리의 진정한 소망은 어떤 것일까요?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맞이하며,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점검하고 확인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세 문장으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1)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2)보이는 소망이 진정한 소망이 아닙니다. 3)보지 못하는 것을 소망하면 참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먼저 사도바울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조금 어리둥절한 말씀입니다. 로마서의 주제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이신칭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오늘 본문에서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한 주석가는 이 문장을 세 가지 의미로 주해하고 있습니다. 1)소망이 수단인가?(By Hope) 2)소망이 상태인가?(In Hope) 3)소망이 목적인가?(For Hope)
여기서 사도바울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수단이 아니라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소망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견해에 동의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어떤 여건 속에서도 소망이 있습니다. 이 소망이 그들을 어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바라보게 합니다. 꽃다운 나이의 자녀들이 갑작스런 불의의 사고로 하나님 곁으로 먼저 가더라도, 그런 상황 속에서도 소망을 가지며,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4:13)
죽음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슬픔 중에서도 가장 큰 슬픔입니다. 저는 호상(好喪)이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장수해도, 아무리 건강하게 오래 살았어도, 아무리 평안하게 세상을 떠났어도, 이별은 한없이 슬픈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장례는 가슴 아픈 슬픈 이별의 장례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슬픔 가운데서도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말라는 말씀은, 비록 슬픔 가운데 있더라도, 소망 가운데서 소망을 바라보며 그 슬픔을 이겨내라는 사도바울의 따뜻한 권면의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둘째, 보이는 소망이 진정한 소망이 아닙니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분들이 우리의 곁을 떠났습니다. 지난 주에는 한 장례식장을 방문했는데, 약 15개 빈소의 대다수 사망자가 70~90대 연령인 것을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이 때가 주님을 만날 때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시편기자가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시 90:10)라고 한 것이 문자적으로 인생의 길이를 칠십이나 팔십으로 정의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 말씀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크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보이는 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역설의 진리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현실이지만, 또한 눈에 보이는 것들이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현실을, 보이는 것들을 직시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들, 영원을 바라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현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보이는 것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보이는 몸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보이지 않는 우리의 영혼은 영원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남미 에콰도르에 거주하고 있는 식인부족으로 알려진 아우카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다 다섯 명의 동료와 함께 순교한 짐 엘리엇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He is no fool who gives what he cannot keep to gain that which he cannot lose) 시카고의 명문 휘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전도양양한 앞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위해 생명 바쳐 헌신한 그의 믿음은 훗날 큰 열매를 맺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소망하면 참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의 로마서 강해에서 이 문장의 바른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문장의 방점은 참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참음으로 기다림은 인내하며 기다리는 태도를 말하지만, 억지로 수동적으로 마지못한 기다림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기쁨 가운데서 감사함으로 기다리고 있는 매우 능동적인 자세를 표현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시편에 기록된 파숫꾼의 아침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하도다”(시 130:6) 파수꾼이 반드시 밝아오는 아침을 기다리는 자세는 확신 속에서의 간절한 기다림입니다. 비록 현실이 어렵더라도 반드시 아침이 밝아옴을 아는 것처럼 참 소망의 사람들은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서 참음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우리의 선진들도 이러한 믿음 속에서 소망하며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는 말씀의 의미를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알게 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강조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역설의 진리요, 그리스도인이 걸어가는 믿음의 길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가 아닙니다. 현실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하다는 부활의 소망 가운데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소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소망이 이 땅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지요? “세상에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날 되어도 구주의 언약 믿사와 내 소망 더욱 크리라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찬송가 488장)
2022년의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맞이하여,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영원한 부활 소망 가운데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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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지구촌 교회
2017년 고난주간 새벽기도회 설교자료
고난 주간 예수님의 행적을 중심으로 꾸몃습니다.
월요일 / 마 21:12-17 / 성전 청결 / 찬 303장
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14.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16.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17.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이번 고난주간 한 주간은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과 행적을 묵상하며 우리 함께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경건훈련에 힘쓰고자 합니다. 오늘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고난의 한 주간 중에 월요일의 행적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어제가 종려주일이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바로 다음 날인 월요일 오늘은 성전을 청결케 하신 날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돈을 바꾸고 비둘기를 파는 상인들을 향해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하시며 내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한 성전에 들어가셔서 채찍을 휘두르셨으며 상을 엎으신 것은 그만큼 당시 종교가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하여 전국에서 제물을 끌고 왔는데 그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하여 제물에 쓰일 짐승들을 팔도록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상인들은 제사장과 결탁하여 순례자들이 정성껏 가져온 제물을 까다롭게 판정하여 불합격판정을 내리고 자기들의 가축을 사도록 만들어 폭리를 취하여 제사장과 나눠가졌습니다.
그리고 돈 바꾸는 자들은 당시 남자들은 성전세를 은 반세겔씩 내야했는데 당시 화폐는 로마 황제의 형상이 새겨져 있으므로 그것을 우상으로 취급하여 유대화폐로 환전하여 내도록 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환전상들은 차액을 남겨 폭리를 취했고 제사장들에게 뇌물을 바쳤습니다. 그 결과 거룩해야 할 성전이 장사와 도둑의 소굴이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의 성전을 방문하신다면 어떠하실까요? 거룩한 것만 있어야 할 텐데 과연 어떠한지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한 것은 주님을 마음에 모셔들이면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회개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 마음에 양심의 채찍을 드셔서 회개케 하십니다. 그래서 듣지 않으면 다른 채찍을 드십니다. 징계의 채찍입니다. 그리고 상을 엎으십니다. 상이 무엇입니까? 시편 1편에 우리에게 상을 베푸신다 하셨듯이 복으로 주신 여러 상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유대의 저 부패하고 타락한 제사장들과 서기관 바리새인과 상인과 환전상들은 다름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긴다면서도 자꾸만 마음의 성전을 더럽히며 살지 않았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다울 때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 진실로 회개하는 고난주간 첫 날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화요일 / 마 21:23-27 / 논쟁과 강론 / 찬 461장
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2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26.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27.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고난 주간 화요일에 예수님의 행적이 마 21∼25장, 막 12∼13장, 눅 20∼21장, 요 12장 등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분량이 많아 다 읽지 못했습니다. 화요일은 이른 아침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다 열매 없는 무화과를 보시고 저주하신 사건부터 시작하여 성전에서 대제사장 및 장로들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이날 예수님은 포도원 농부의 비유, 혼인잔치의 비유, 무화과나무의 교훈을 말씀하시고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과 당신이 고난을 당한 뒤 부활할 것, 그리고 말세에 있을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날부터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에서 예수님을 흉계로 잡아 죽일 의논이 벌어졌습니다.
이 날 하신 일 가운데 잊지 못할 성경 구절 하나를 댄다면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이십니다. 한 알의 밀이 되어 죄인을 위해 열매를 맺으시겠다는 예언이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우리에게 그렇게 십자가 지고 따라오라고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자기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영생 길을 갈 수 없고 다른 사람을 생명으로 이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화요일은 흐트러진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세우신 날입니다.
아직도 진리가 없어 아직도 논쟁 중이라면 논쟁하지 말고 하나님께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 내 생각과 내 주장이 하나님의 진리를 얼마나 배척했습니까? 내가 죽어야 삽니다. 내가 죽어야 모두가 삽니다. 나의 고집과 주관이 죽으면 됩니다. 그래야 예수가 나타납니다. 죽는 일이 어렵습니까? 그러나 죽으면 평안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이 이 날 많은 것을 가르치신 것처럼 우리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우십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 진실로 말씀에 서서 앞서 가신 우리 주님을 따르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수요일 / 마 26:6-13 / 옥합을 깨뜨리다 / 찬 311장
6.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10.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고난 주간 예수님의 수요일 행적이 마 26장, 막 14장에 나타납니다. 이 날 예수님께서는 베다니 나병환자인 시몬의 집에 초대 받아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이 값진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 행위는 당시로서는 최고의 존경과 헌신의 상징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제자들은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도다”며 분개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셨습니다. 참 신앙의 표본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면 그 무엇을 드려도 아깝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께 헌신하는 것을 돈으로만 계산하는 인색한 사람 이 있습니다. 심지어 유다처럼 예수님 팔아먹으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참으로 슬픈 일은 가룟 유다가 이날 밤 대제사장들을 만나 은 30에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약속했다는 것입니다. 진짜와 가짜는 물질로 거의 다 판별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 하신 대로, 물질을 보물로 삼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물질생활만 봐도 그 신앙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무얼 섬깁니까? 하나님입니까? 돈입니까?
우리 마음의 재판정은 어떻습니까? 물질에 마음이 기울어 잘못 판단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살아도 예수 죽어도 예수 예수님밖에는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까지 지셨는데 우리는 주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인색한 제자들이 아니라 베다니 마리아처럼 우리 마음과 뜻과 정성과 성품과 힘과 생명까지라도 바쳐서 사랑하십시다. 그래서 예수님께 희생을 드린 마리아처럼 참된 복음적 신앙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참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십시다.
목요일 / 눅 22:14-23 / 최후의 만찬 / 찬 144장
14.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1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7.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1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9.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21.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22.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23. 그들이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예수님께서 고난 주간 목요일에 하신 일은 다락방에서 식사하면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떡을 떼시고 포도주를 나누시며 최후의 만찬을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시려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주님의 살아생전으로는 마지막 밤입니다.
먼저 주님은 제자들과 식사하던 예수님께서는 대야에 물을 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내가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섬김의 본은 물론 영적으로도 서로 기도해서 씻어주라는 교훈입니다. 열대지방이기에 발을 씻지 않으면 냄새가 나듯 형제의 단점을 보면 비난이 앞서려고 하는 등 힘들지만 그것을 우리가 씻어주고 없애주는 것이 당연히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떡과 포도주를 떼시며 “이것은 내 몸이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고난은 우리의 죄를 사하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고난을 실패와 부정하게 여기는 이단들처럼 예수님을 두 번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식사 후 주님은 제자들과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땀방울이 피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칼과 몽치를 든 군인들에게 체포되었고, 체포된 예수님을 따라가던 베드로가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고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예언이 생각나서 통곡했던 일이 목요일 밤에 일어난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목요일에 된 일처럼 우리가 진정 예수님의 피와 살에 참여한 성도라면 이웃의 진동하는 죄악을 위해 기도하며 씻어줄 수 있는 참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나를 위해 희생하셨는데 우리에게 맡기신 십자가 달게 지고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지 않고 따라갈 수 있는 참 믿음의 사람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금요일 / 마 27:45-50 / 가상 칠언 / 찬 143장
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고난 주간, 금요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날입니다. 검과 몽치를 든 원수들에게 잡혀가신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집, 공회, 빌라도 재판 등을 거쳐 십자가에 달리시게 되는데 다 말씀드릴 수 없고 십자가에서 하신 가상칠언 즉 일곱 마디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달하고자 합니다.
1,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잔악무도한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한없는 사랑과 용서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두 명의 강도 중 회개한 강도에게 구원을 약속하신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3, “여자여, 보소서.” 하고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최후의 순간까지도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는 모습입니다.
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외침은 주님이 우리 대신 버림 받으신 순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5, “내가 목마르다.” 피와 땀을 흘리시고 탈수로 고통하신 장면인데 우리의 목마름의 고통을 주님께서 대신 당하신 모습니다.
6, “다 이루었다.” 십자가상에서 인류의 구원을 다 이루신 주님의 승리의 외치심입니다.
7,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마지막 영혼이 떠나시기 전에 아버지의 손에 영혼을 의탁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 뜨거운 사랑을 깊이 기억하시고 진실로 감사와 영광을 올리시는 귀한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토요일 / 마 27:62-66 / 무덤에 계심 / 찬 150장
62.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63.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64.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65.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66.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고난 주간, 오늘은 마지막 토요일입니다. 이 날은 예수님께서 무덤에 있던 때입니다. 어제 금요일,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후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사람 부자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장사하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갔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귀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본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집에 돌아가 예수의 시체에 바를 향품을 준비했습니다.
그 사이에 저녁이 오고 토요 안식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눅23:56에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모두 쉬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은 쉴 틈이 없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빌라도에게 가서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63-64절) 해서 빌라도의 허락을 받고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켰습니다.
지금도 우리 원수 마귀는 쉬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시험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로 깨여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고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산 그 믿음과 능력으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 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동안 예수님의 행적을 말씀드리면 고난 주간 첫째 날 주일은 “예루살렘 입성의 날”, 둘째 날 월요일은 “성전 청소의 날”, 셋째 날 화요일은 “변론의 날”, 넷째 날 수요일은 “사랑과 배신의 날”, 다섯째 날 목요일은 “최후의 만찬의 날”, 그리고 고난 주간 여섯째 날 금요일은 “수난의 날”, 그리고 토요일은 예수님의 몸이 무덤 속에 계시던 날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예수와 함께 죽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우리도 죽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와 함께 무덤 안에서 죽고 또 죽었습니다. 더욱 성령으로 죽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늘 성령의 은혜를 받아 우리에게서 예수 죽은 것이 나타나고 더 나타나서 나는 사라지고 부활하신 예수님만 나타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끝)
[고난주간 설교] 십자가 고통을 넘어서 (요 19: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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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요?
다른 복음서와 다르게 요한이 바라본 십자가 사건,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 요한이 증언하고자 했던 것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봅니다.
“매년 부활절이 다가올 때마다 예수님의 고통을 더 기억하고자 하는 마음에 예수님의 수난을 표현한 영상물들이 재생되곤 합니다. 바로 우리 때문에 주님께서 그 끔찍한 십자가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하기에, 우리가 받은 구원이, 새 생명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축복이 값없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그 고통을 감내해 내심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기에, 우리는 주님께서 당한 고통을 마땅히 알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그 고통에 대한 감정적인 아픔에만 머물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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