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복음 7 장 설교 | [조정민 목사 설교]때가 아직 이르다(요한복음7장1-9절) 답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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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직교회 주일예배
설교자: 조정민 목사
날 짜: 2014년 11월 9일
제 목: 때가 아직 이르다
본 문: 요한복음 7장 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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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한복음 7장 1절에 보면,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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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ooyoungro.org

Date Published: 4/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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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 대학마을교회 – 요한복음 7장 1~13 ‘내 때’와 ‘너희 때’

요한복음 7:1~13 ‘내 때’와 ‘너희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요 7:6) 요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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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univ.or.kr

Date Published: 2/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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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7장 – 문제와 해설]

요한복음 7 장. 1.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신 곳은 이스라엘의 중심지대인 유대나 예루살렘이 아니다. 어디에서 주로 활동하셨으며 왜 그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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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khong.org

Date Published: 12/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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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7장 강해] 24. 오직 예수 (신앙과 반항) : 네이버 블로그

예수님께 반항하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실례를 통해서 등장한다. 이 사람들을 설교로 소개하는 이유는 “나는 이런 사람은 되어서는 안되겠다”라는 생각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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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2/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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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과: 요한복음 7장

맥락이란 특정한 성구, 사건, 또는 이야기를 둘러싼 상황이나 배경을 포괄하는 용어이다. 내용이란 본문에 나오는 줄거리, 인물, 사건, 설교, 그리고 영감에 찬 설명 등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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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2/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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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민 목사 설교]때가 아직 이르다(요한복음7장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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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요한 복음 7 장 설교

  • Author: svcforhy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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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7.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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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7장 1~13 ‘내 때’와 ‘너희 때’- 노벨(Alfred Bernhard Nobel)의 값진 삶

요한복음 7:1~13

‘내 때’와 ‘너희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요 7:6)

요즘 사람들은 100세 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100세까지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2020년 통계청 수치를 보면 80세까지 사는 것도 큰 복입니다. 75세까지 살 확률 54%, 80세 30%, 85세 15%, 90세 5%입니다. 건강하게 살 수 있는 평균 나이는 76~78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백 년, 천 년 살 것처럼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입에 게거품을 물고 살아갑니다. 그러면 짧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의미와 가치가 있을까요?

헬라어에 ‘때’란 단어가 셋이 있습니다. 크로노스(χρονοζ)와 카이로스(καιροζ), 그리고 호라(ὥρα)입니다. ‘크로노스’는 몇 년 몇 월 몇 시와 같은 시간입니다. ‘카이로스’와 ‘호라’는 하나님의 때를 가리키는데, ‘호라’는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때를 말하고, 카이로스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가장 좋은 시간을 뜻합니다. 요한복음 2장 4절의 ‘내 때’의 때는 바꿀 수 없는 호라(ὥρα)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내 때’는 카이로스(καιροζ),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시간입니다. 초막절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형제들의 권유에 따라 올라가시지 않고 하나님 사역에 가장 좋은 시간을 택하여 올라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짧은 생애에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역을 완성하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를 따라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내가 원하는 때를 좇아 살지 말고 하나님의 때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 예수님을 믿지 않는 형제들(요 7:1~5)

예수님은 유대에 가시지 않고 갈릴리에서 조용히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신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의 3대 명절 중 하나인 초막절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초막절은 유월절, 오순절과 함께 3대 명절 중 하나입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장막 생활을 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2세 이상의 남자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절기를 지켰습니다. 그들은 감람나무와 종려나무 등의 가지로 집을 만들어 7박 8일 동안 이곳에서 지냈습니다(레 23:39~43). 그들은 임시초막에 머물면서 광야 기간에 만나로 먹여주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고, 초막같은 이 세상에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지냈습니다.

초막절은 9, 10월에 올리브, 포도, 무화과 등을 거두어들이는 시기와 겹치므로 추수 감사절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날을 일명 수장절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추수한 곡식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즐겼습니다(신 16:13~17). 역사학자 요셉푸스(Josephus)는 많은 절기 중에 가장 거룩하고 성대한 축제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 축제는 보지 않고는 누구도 그 축제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초막절이 다가오자 동생들도 마음이 들떠 하던 일을 멈추고 예루살렘에 올라갈 준비를 하느라고 야단이었습니다. 머리에 무스를 바르고, 구두에 광을 내고, 하얀 와이셔츠에 빨간 나비넥타이를 매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예루살렘에 올라갈 준비를 하지 않고 전도만 하셨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동생들은 예수님께 충고했습니다.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요 7:3~4)

이 말을 풀어보면 “형님, 촌구석에서 전도만 하고 계시면 어떻게 됩니까?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한번 펼치고 드러내셔야 하지요. 형님, 답답합니다.” 동생들은 구름 떼같이 사람들이 모이는 축제 기간에 예루살렘 중앙에서 큰 능력으로 자신을 나타내라고 압력을 넣었습니다.

동생들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대권을 잡으려면 중앙무대에서 대중의 지지를 받아야 합니다. T.V.에도 출현하고 기자회견도 하여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매스컴을 타지 못하면 출세할 수 없습니다. 여하튼 출세하려면 중앙무대로 진출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이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자식이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라.”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동생들이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형님 예수님의 덕을 보아 자신들도 좀 출세하고자 함입니다. 그들의 가문은 뼈대가 있는 다윗 왕손 가문입니다. 그런데 몰락하여 갈릴리 나사렛에서 다 쓰러져가는 초가삼간에서 목수 일로 막노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잃어버린 가문의 영광을 되찾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가난과 초가삼간을 벗어나 맨션아파트에서 살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출세하여 세상에서 ‘여봐라’ 하며 살고 싶었습니다. 이는 유독 이들의 생각만은 아닐 것입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모두에게 이런 갈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생들은 빵을 쫓아다니는 무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리는 예수님을 이용하여 빵을 얻고자 했다면, 동생들은 예수님을 이용하여 명예를 얻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대상이 다를 뿐입니다.

지금도 개중에는 예수님을 이용하여 명예를 얻고자 하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이용하여 물질을 얻고자 하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이용하여 권력, 예수님을 이용하여 어떤 사람은 남편감, 어떤 사람은 신부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이용하여 돈을 벌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근본 문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 믿지 않은 데 있습니다.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요 7:5)

보통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긍정한다, 인정한다,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믿는다는 것은 그 인격과 그의 존재를 전폭적으로 믿고 신뢰하고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함이 다 옳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동생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인격과 존재를 믿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알지 못했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燈下不明)’라는 말처럼, 그들은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믿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왜 예수님을 믿지 못했을까요?

이는 그들이 세상 영광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세상 욕심과 세상 영광은 영적인 눈을 멀게 하고, 영적인 생각을 막히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고,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려면 세상 영광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을 박아야 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라고 했습니다.

2.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느니라(요 7:6~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요 7:6)

예수님은 유대로 올라갈 것을 요구하는 동생들의 제안에 세속사인 ‘너희 때’와 구속사와 관련된 ‘내 때’를 대조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때가 늘 준비되어 있다’는 것은 언제든지 자기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장소에 가서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기 뜻과 자기 때를 따라 살므로 자기 마음대로, 자기 계획대로 예루살렘에 올라가 축제를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잘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행진할 때, 자기들이 가고 싶은 아무 때나 행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밤에 불기둥이 멈출 때 따라서 멈췄고, 낮에 구름 기둥이 움직일 때 행군했습니다. 하나님은 40년간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법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를 따라 사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라면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나님의 때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지 않는 자와 대조되는 삶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자기 유익을 따라 계획하고, 자기 계획에 맞춰 자기 유익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향해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5~6,13)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 때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때 어떤 일을 당하게 됩니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 증언함이라.”(요 7:7)

형제들은 자기 뜻과 자기 계획대로, 자기 가치관대로, 자기 유익을 좇아 살아가므로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이 원하는 삶을 살지 않고 세상 일들을 악하다고 하시므로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세상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과거 나의 가치관과 계획과 생각대로 살 때 세상이 나를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친구들에게는 잘 나가는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친구들 따라 술 마시고 춤추고 놀아주니 누가 미워하겠습니까? 어디를 가나 인기짱입니다. 세상을 따라 살면 우리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좇아 살면 세상은 우리를 박해합니다. 우리가 변하여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면 세상은 우리에게 적대감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가치관대로, 성경의 원리를 따라 살면 박해를 받습니다. 이때 우리는 조금도 이상히 여길 필요 없습니다. 성경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도서에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 3:1)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기한(καιρὀς)’은 우리의 의지로 때와 시기를 조절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한정된 시간을 말합니다. 우리가 낳고 죽는 것을 내 의지와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낳고 죽는 것을 조절할 수 있습니까? 이는 하나님의 뜻과 의지 속에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하루 24시간, 1,440분입니다. 이 정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실패와 성공이 판가름이 납니다. 요한 웨슬리는 하루를 5분 간격으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1분도 헛되이 보내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스위스의 한 노인이 80 평생을 돌이켜 보며 자신의 시간을 헤아려 보았더니, 80평생 중에 26년간 잠을 잤고, 21년간 노동했고, 6년간 식사에 허비했고, 약속을 기다리는데 기다린 시간을 5년을 허비했고, 5년간을 혼자 낭비했고, 아이들과 노는데 26일, 세수하는데 28일, 넥타이를 매는데 18일, 담뱃불을 붙이는 데 12일을 허비했습니다. 그가 행복을 누렸던 시간은 46시간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80년을 산다면 평생을 스마트폰과 TV 시청과 골프 등으로 30년을 허비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성경은 인생을 70으로 보았고, 길면 80이라고 했습니다(시 90:10). 우리는 하루 24시간, 1,440분이라는 제한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영원하고 가치 있는 것에 사용해야겠다고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때는 중요합니다. 때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은 시간을 아무렇게나 헛되이 보내지 않습니다. 노벨(Alfred Bernhard Nobel)이 값진 삶을 살게 된 일화가 있습니다. 노벨의 형이 죽었는데, 신문에 노벨이 죽은 것으로 잘못 기사가 실렸습니다. 노벨의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죽음의 상인, 사망’이라는 기사였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한 그 기사를 읽는 순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 또한 돈 많은 사람, 죽음의 다이너마이트를 팔아 부자가 된 정도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내가 죽었을 때 사람들이 “저 사람은 위대한 삶을 살았다.”라는 평가를 받아야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어 모은 돈을 모두 인류의 발전에 공헌한 이들을 위해 노벨상을 만드는데 기여했습니다. 그는 죽음의 때를 생각하고 가치 있는 일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

우리가 살아가면서 실패하는 것은 하나님의 때가 아니라 내 때에 맞춰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를 맞춰 사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사람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매사 하나님의 뜻과 때를 분별하여 하나님의 때를 선택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뜻과 때를 분별하고,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3. 은밀히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10~13)

예수님은 동생들이 모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을 때 조용히 말씀을 가르치시다가 명절 중간쯤 혼자 조용히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형제들과 함께 올라가면 앞뒤에서 나팔을 불며 야단법석을 떨기에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조용히 혼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들레지 않고 조용히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기도하더라도 자기를 드러내고, 금식하더라도 드러내고, 남을 돕더라도 자기를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조용히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한 영혼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셨습니다.

요즘은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큰 소리를 잘 냅니다. 내가 잘났다며 각을 세우고 자기를 내세웁니다. 말도 튀고, 글도 튀고, 옷차림도 튀고, 광고도 튀고, 책 제목도 튑니다. 뭔가를 보여 주기 위해 사실보다 과장하고 거짓으로 꾸밉니다. 일부 선교사들이 선교 후원비를 받으려고 사역을 과대 포장하여 페이스북과 카톡에 올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역자들 또한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과대 포장하여 선전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종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사 42:2)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역사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종은 겉으로 외치지 않습니다. 대화를 독점하지 않고, 그 소리가 거리에 들리지 않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과장하지 않습니다. 종은 맡은 일을 조용히 일합니다. 조금도 자기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실현 가능성 없는 일을 벌여놓고 요란하게 광고를 내지만, 종은 그런 사람들과 달리 한 사람을 귀히 여기고 조용히 기도하고 복음을 전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소금과 빛은 말없이 조용히 자기를 녹여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추고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며 맛을 냅니다. 하나님의 역사 또한 가리면 가릴수록, 은밀하면 은밀할수록 더욱더 드러나고 빛을 냅니다. 바울은 일생 주님만을 드러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상)

바울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 사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종은 이름이 없습니다. 종은 주인의 이름만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종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자기 뜻을 성취하고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이의 기본자세입니다.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실낙원(Paradise Lost)》의 저자 존 밀턴(John Milton)의 무덤과 흉상이 있습니다. 죤 밀턴의 흉상 밑에는 딱 한 줄, ‘《실낙원》의 작가 존 밀턴’이라고 쓰여있습니다. 그런데 그 밑에 흉상을 세운 사람 윌리엄 밴손은 33개의 단어로 열거되어 있습니다. 혹 윌리엄 밴손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요?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마 6:1)

구제와 기도와 금식은 성도의 덕목입니다. 이 덕목의 요소는 은밀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의를 행할 때 어떤 모양으로든지 자신의 의를 나타내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받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상급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상급을 받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심을 믿는 것입니다(히 11:6).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형식적인 삶보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자기를 드러내지 말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드높이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때를 좇아 살려면 분별력과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때를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를 선택하려면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짐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때를 잘 선택하고 들레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요한복음 7장 강해] 24. 오직 예수 (신앙과 반항)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사람에게는 ‘반항심’이라는 것이 있다. 여기서의 반항심은 좋은 의미로 반항심이 아니라, 나쁜 의미의 반항심이다. 권위에 대해 반항하고 싶어하는 그런 마음이다. 자식이 부모에게 도전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아내가 남편에게 그 권위에 맞서려는 것, 제자들이 스승을 대적한다. 백성이 통치자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이런 일들이 우리 주위에 비일비재하다.

이런 마음이 왜 태어날 때부터 마음에 자리 잡고 있을까?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의 권위에 저항했던 아담이 우리에게 물려준 아주 좋지 못한 유산이 아닐까? 어떤 사람들은 이와 같은 반항의식을 미화시켜서 심지어 “위대한 사람은 반항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들으면 그럴듯하다. 카무스라는 사람은 “나는 반항한다. 그럼으로 존재한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반항심을 미화시키려고 하지만, 이는 고약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인간이 가장 악랄하게 반항한 대상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에게 반항한 것이다. 예수님이 본인이 하나님의 아들, 생명이라고 하자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말했다.

오늘 요한복음 7장을 두고 생각을 해보려고 한다. 예수님께 반항하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실례를 통해서 등장한다. 이 사람들을 설교로 소개하는 이유는 “나는 이런 사람은 되어서는 안되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할 이유다. 이런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기 위해서다. 우리 나름의 반성, 결심, 결단을 우리 주님께서 기대하는 마음에서 주신 것일 것이다. 5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6장에서는 갈릴리에서 사역하신다. 6장에서 사역을 하시던 갈릴리는 봄철이었다. 그때는 갈릴리가 참으로 아름다울 때다. 정말 백합화가 기가 막히기 아름답다.

이렇게 밀과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는 아름다운 계절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사역을 하셨다. 그러다가 오늘 7장으로 오니 때가 가을로 바뀐다. 초막절을 통해서 알 수 있다. 9~10월이라는 것이다. 그 반년 동안 사역하신 내용에 대해서 마태복음 12장 이하가 말해주고 있다. 우리가 이미 6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6장 마지막에서 예수님은 시험기를 맞이한다. 임금 삼으려던 예수님께서 하신 설교를 듣고 상당수가 예수의 곁을 떠났다. 지도자에게 있어서 주위에서 사람들이 떠나는 것만큼 외롭고 적적한 것이 없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들을 보고 항상 좋은 이야기만 한 것은 아니셨다. 책망도 하셨다. 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미 “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 죄를 책망하니, 아픈 데를 찔린 받은 사람들이 좋아할 일이 없다. 그렇게 혼자 남으신 예수님. 이제는 마음 놓고 갈 곳도 없다. 갈릴리는 익숙한 곳이기에 사람들의 존중을 받고 인지도를 누리고 했던 것일 텐데, 이제는 그곳도 편한 곳이 아니게 되었다. 예루살렘에서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입장을 우리가 보면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느니라”

참 딱한 처지에 있는 예수님 앞에 초막절이 가까워 온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할 때의 역사를 잊어버리지 말고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그 절기를 지킨다. 그리고 그곳에서 축복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지키는 절기. 초막절을 통해 감사를 올리는 절기다. 이런 대절기 때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7장 안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보자. 먼저 예수님의 형제들을 살펴보자.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의 4형제다. 이 형제들이 같은 어머니 마리아 밑에서 동거 생활을 했던 것이다. 5절에 보면 이들은 한 사람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없었다. “5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 이러라” 누구보다도 예수를 믿어야 할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종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하나님이시다. 그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 그런데 왜 형제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수많은 이적을 행하시며, 창녀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 시편 저자가 말한 것처럼, 가정에서도 참 힘들었을 것이다.

7장 초두에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빈정거리는 듯한 부분이 나온다. 예수님의 인기가 떨어지면서 형제들 또한 그 부담을 가지고 있다. 예수를 보니 마음이 편하지 못하였다. 그러고 보니 초두에 나오는 말은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하는 말이 지방에서만 묻혀서는 되겠는가? 이 기회를 왜 놓칩니까? 올라가서 그 인기를 회복해 봅시다.” 한 번 세상에 자기를 PR(홍보)을 하고 싶다면 중앙으로 가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는 빈정거리는 말이었다. 형제들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들의 말에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라는 말로 대신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설익은 기회로 행동하시지 아니하시며, 보이지 않는 시계를 하나님의 명령을 통해서 본다. 분명한 타이밍으로 주님은 움직이신다.

형제들에 대해서 우리는 보았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비아냥거리는 그들. 우리는 이 형제들을 보면서 우리는 마음에 기도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이 되지 않게 하소서’ 아직도 교회 안팎에서 보면, 예수를 가장 잘 믿어야 할 처지에 있는 사람이 가장 못 믿는 경우가 있다. 목사의 자녀들이 신앙에서 겉도는 것과도 같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가끔 보면, 그 믿음의 집안의 자녀들이, 남편이 왜 믿지 못하는지 알 수가 없다.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신 사람들이 끝까지 안 믿는다는 것은 ‘마음에 반항심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이다.

결심하라. 나는 예수의 형제처럼 되고 싶지 않다고. ‘고치자’.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루살렘으로 가면, 그곳에서 예수님께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학벌을 따지는 사람이었다. 당시 남을 가르치려면 ‘랍비’라는 칭호를 가져야 했다. 예수님은 랍비가 아니었다. 지금도 있는 랍비 학교, 거기에 입학한 사람들은 ‘굉장히 공부를 많이 한다.’ 그곳은 졸업도 학위도 없다. 단지 주위 동료들이 ‘인정’해줘야 랍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10, 20대의 랍비가 나오면 참으로 대단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학력이 없다.

사도 바울이 가끔 “나는 가말리엘 문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만큼 어디서 공부했느냐가 그 당시 사람들에게 빠르게 인정받을 수 있는 수단이었다. 선생이 가말 리 엘이면, “대단한 곳에 배웠다”라고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것이 없었으며, 마음속에 반항심이 있던 사람들은 반항했다. 16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이는 즉, 예수님의 학벌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제66과: 요한복음 7장

요한복음 7:1~13 예수께서 초막절에 참여하시다

다음 질문을 칠판에 쓴다. 예수님에게는 형제자매가 있었는가?

학생들에게 그 질문에 답해 보라고 한다. 필요하다면, 요셉과 마리아에게는 예수님 이후에 태어나 예수님과 같은 가정에서 그분과 함께 양육받은 자녀들이 있었다는 점을 학생들에게 이해시킨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지 요셉의 아들이 아니므로, 이들은 예수님의 이부 형제자매들이었다.(마태복음 13:55~56 참조)

예수님과 같은 가정에서 자란다는 것이 어떠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여러분이 예수님과 함께 자란다면 그분을 믿기가 더 쉬웠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왜 그런가? 아니면, 왜 그렇지 않은가?

요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의 “형제들”(요한복음 7:3, 5) 중 일부가 그분을 어떻게 여겼는지를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형제들은 아마도 예수님의 이부 형제들을 가리킬 것이며, 또한 다른 가까운 친척이 포함될 수도 있다.

몇몇 학생에게 요한복음 7장 1~5절을 돌아가며 소리 내어 읽어 달라고 한다.

5절에서는 예수님의 형제들에 대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한 학생에게 십이사도 정원회의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가 기록한 다음 글을 소리 내어 읽어 달라고 한다.

이미지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분의 복음에 담긴 구원의 권능에 대한 간증이 가족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 그들이 같은 가정에서 자라며 요셉과 마리아의 자애로운 영향력을 받았음에도,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성역, 기적들을 알고 있었음에도, 가장 가까운 친척인 그들은 이 시점까지는 아직 그분을 메시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나중에 개종한 것이 분명하다.(사도행전 1:14)”(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 vols. [1965–73], 1:437)

예수님의 가족 중 일부가 그분의 가르침과 기적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분을 믿지 않았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요한복음 7장에는 예루살렘에서 열린 초막절 축제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요한복음 7:2 참조) “가장 성대하고 가장 즐거운 축제로”(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 Bible Dictionary, “Feasts”) 여겨진 이 8일 간의 축제 기간에, 많은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의 속박에서 벗어나 광야에서 임시로 지은 오두막, 즉 초막에 살며 체류하던 시기에 하나님께서 내려 주셨던 축복들을 기념했다.(레위기 23:39~43 참조) 유대인들은 또한 그해에 수확한 과실과 곡식에 대해 감사를 드리고 경축했다.(출애굽기 23:16 참조)

맥락과 내용 이해하기 복음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의 기초 중 한 가지는 경전 구절의 맥락과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다. 맥락이란 특정한 성구, 사건, 또는 이야기를 둘러싼 상황이나 배경을 포괄하는 용어이다. 내용이란 본문에 나오는 줄거리, 인물, 사건, 설교, 그리고 영감에 찬 설명 등을 포괄하는 용어이다. 학생들이 경전의 맥락과 내용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면, 그들은 영감받은 저자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깨달을 수 있도록 준비될 것이다.

3~4절에 따르면, 예수님의 형제들은 그분이 무엇을 하기를 원했는가?

요한복음 7장 6~10절에 대한 요약으로, 예수께서는 그 축제에 가는 것을 지체하셨으나 자신의 형제들에게는 가도록 권하셨다고 설명한다. 축제가 시작된 후, 예수께서는 은밀히 그곳에 가셨다. 예루살렘에 있는 일부 유대인 지도자들이 그분을 죽이고자 했으나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었다.

한 학생에게 요한복음 7장 11~13절을 소리 내어 읽어 달라고 한다.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은 각각 예수님에 대해 어떤 말들을 하고 있었는가?

예수님 시대와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에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다고 설명한다. 일부 사람들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온 인류의 구주라는 사실을 안다. 그분을 믿고 그분의 복음이 참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분의 가르침이 참되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학생들에게 요한복음 7장을 계속 공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이시고 그분의 가르침이 참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찾아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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