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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1서 3
제 3 장. 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
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9/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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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3 | KRV 성경 | YouVersion – Bible.com
요한일서 3 · 1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
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11/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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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3 KLB –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 된 – Bible Gateway
요한일서 3. Korean Living Bible … 3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한번 생각해 보십 시오. 그 큰 사랑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
Source: www.biblegateway.com
Date Published: 9/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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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3(월) “요한일서 3:13-24” / 작성: 최현준
요한일서 3장 13-24절을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인 13-18절은 그리스도인이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할 근거와 방법을 교훈하며 후반부인 19- …
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10/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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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3장
요한일서 3장 요한일서 3장은 형제 사랑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3장의 핵심 구절은 16절로 형제 사랑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
Source: 392766.tistory.com
Date Published: 3/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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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일서 3장 주석 – 요한서신 – 예사랑 성경 연구회 – Daum 카페
요한일서 제 3장 =====3:1 … 요한은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로써 값없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이 얼마나
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7/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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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3장 (개역개정/쉬운성경, 자비교회 성경통독)
요한일서 3장 (개역개정/쉬운성경, 자비교회 성경통독) … [요일]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
Source: reformedkjy.tistory.com
Date Published: 1/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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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3장 3-4절, 9절 말씀 묵상 – 복음뉴스
요한 일서 3: 3-4 , 9 3 주를 향하여 이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
Source: www.bogeumnews.com
Date Published: 1/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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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3번 –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 (요일 3:1-24절)
사도 요한은 2장 28절에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생각은 마지막 날에 확실히 이루어질 신자의 구원의 완성과 이를 가능케 하는 하나님 …
Source: www.jesusfestival.org
Date Published: 11/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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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요한 일서 3 장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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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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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1서 3
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5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11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1)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1)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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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11 우리가 서로 사랑할찌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2021/09/13(월) “요한일서 3:13-24” / 작성: 최현준
본문 요한일서 3:13-24
찬송가 220장 ‘사랑하는 주님 앞에’
요한일서가 기록되고 읽혔던 시대에는 영지주의 이단이 기독교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은 선하지만, 육체와 함께 육체적 욕구들은 악한 것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적인 욕구들을 절제하는 것을 신앙적인 삶으로 오해하는 경향이있었습니다. 그들은 음식을 절제하고, 잠을 줄이고, 말을 적게하며, 성적인 욕구를 억제하는 것을 경건한 삶을 위한 방편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같은 이원론적 신앙은 예배당 안에서의 모습과 일상생활에서의 모습이 서로 다른 이중적인 삶으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없었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요한은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죄의 종노릇하던 우리를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시는 사랑으로 건져주시고 주님의 친구 삼아 주셨습니다. 참된 경건은 육체의 욕구를 절제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으로 형제를 섬기는 방식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3-24절을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인 13-18절은 그리스도인이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할 근거와 방법을 교훈하며 후반부인 19-24절은 형제 사랑이 어떻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연결되는지 교훈합니다.
사랑: 구원받은 사람의 증거(13-15)
(13-15)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요한은 요한일서의 수신자들을 향해 ‘자녀들아’(2:1), ‘아이들아’(2:18)라는 호칭에 이어 ‘형제들아’라고 불렀습니다. 고대 지중해 사람들은 개인의 정체성을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 발견하였습니다. 훌륭한 사람은 곧 가정을 잘 돌보며 지키는 사람을 의미하였으며, 자녀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동함으로 가정에서 특별하게 여기는 가치를 드러내었습니다. 이와같은 문화적 토대 위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는 형제, 자매임을 상기시켜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 18-19절에서 세상은 자기의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이 주님께 속한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교훈하셨습니다. 요한일서 3장 13-15절을 사랑과 미움이라는 키워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세상은 그리스도인을 미워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둘째, 형제 사랑은 구원받은 사람의 표지입니다. 셋째,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며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요한일서의 수신자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았고 순교할 수도 있는 시대를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고난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13절에 ‘이상히 여기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상히 여기다’로 번역된 헬라어를 주로 기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묘사할 때 사용하였습니다. 요한에게 있어 이상한 일은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며 성령의 공동체가 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하늘 가족의 표지이며 영생을 얻은 사람의 생활방식이기 때문입니다.
12절에서 요한은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이 ‘친족살해’였음을 상기시키며 15절에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하였습니다. 우리 안에 영생이 없었을 때는 형제를 미워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태복음 5장 21절 이하에서 새 계명의 적용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만으로도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경고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선생으로 자처하였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주님께서 매섭게 책망하셨던 것은 그들이 겉으로는 율법을 준수하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시커먼 속내를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형제를 향해 분노하고 모욕적인 말을 한 것이 실제적인 살인을 저지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셨으며 이성을 향해 음란한 생각을 품은 것은 곧 간음죄를 범한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영생을 소유한 사람의 마음에 미움이 자리할 수 없는 이유는 성도의 마음이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통치를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타락한 욕구를 따라 살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통치에 순종하며 살기 위해서는 그동안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여겼던 기본적인 감정과 욕구들을 성령 안에서 새롭게 배우고 훈련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배워야 할 감정이며 훈련 받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 행함과 진실함으로(16-18)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많은 성도들이 사랑이라는 감정이 모든 사람 안에 있는 기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새롭게 배우거나 훈련받아야 할 필요성에 대해 간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정의하는 세상의 방식을 살펴보면 사랑은 새롭게 배워야 할 감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집착하고 폭력을 행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지고지순한 사랑을 기대하는 가정에서도 마땅히 있어야 할 사랑 대신에 학대와 살인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와같은 현실을 마주할 때면 사랑은 모두에게 공통적이고 익숙한 것이 아니라 낯설고 배워야할 것처럼 느껴집니다.
요한은 형제 사랑하기를 강조하며 사랑이 무엇인지 정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으며 우리를 얻기 위해서 자신을 버리셨습니다. 우리에게 사랑을 강요하거나 말뿐인 공허한 사랑으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며,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십자가를 통해 증거하셨습니다. 사랑은 행동이며, 사랑은 희생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요한은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표현을 통해 자기 희생 없는 공허한 사랑을 교회 안에서 몰아내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밀알의 사랑을 교회에 심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풍성한 열매가 교회 안에 충만할 것을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17-18)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시작되었고 그 사랑이 교회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며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교회의 본분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만큼 ‘사랑’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사랑’의 가치를 귀하게 생각하는 곳이 있을까요? 그런데 요한은 편지의 수신자들을 향해 형제를 사랑할 것을 강조합니다. ‘말과 혀’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것을 강하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구체적으로 ‘이 세상의 제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채워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재물’이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께 속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재물’은 ‘이 땅’에 속한 것임을 깨닫게 합니다.
돈은 이 땅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막강한 권세를 행사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아무런 힘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했을 때는 돈을 사랑하고 재물을 섬기는 것에 부끄러움이 없었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친구삼아 주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주셨음에도 우리가 여전히 돈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주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음을 경고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돈은 인격적인 성질의 것이 아니지만 성경은 ‘돈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딤전6:10, 딤후3:2, 히13:5).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의 지배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합니다. 돈은 형제를 향한 사랑의 수단이며 도구일 뿐입니다. 이 세상은 황금이 신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형제를 위해 자신의 물질을 나눌 수 있다면 물질과 함께 시간도 재능도 그 어떤 희생도 가능하게 됩니다. 즉, 형제를 향한 사랑은 말 뿐인 공허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이 말해주는 것들(19-24)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구별됨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말과 행동의 절제나 겸양의 태도나 금욕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재물을 형제를 위해 기꺼이 나누는 생활방식입니다. 세상은 피와 땀과 소망인 돈을 흘려보내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이상히 여길 것이며 물질을 흘려보내는 그리스도인은 비로소 자신의 소속이 세상이 아니라 진리임을 알고 믿음에 굳게 서게 될 것입니다.
(20-21)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위선과 위장으로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어도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선생 노릇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것도 그들의 겉과 속이 다름을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생명력이 없는 사랑의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책망하실 것입니다. 요한은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것을 강하게 권면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으로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게 살아갈 것을 요청합니다. 죄가 있는 사람은 그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기 전까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앞에서 떠는 삶을 살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22-24)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형제 사랑으로 증명된 믿음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은 무엇이든 간구하는 것을 받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시든지 그것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형제의 필요를 채우며 연약한 형제를 돕는 일에 사용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돌아보면 처음에는 ‘주님’이라고 시작하지만 이어지는 기도의 목적어는 언제나 ‘나’임을 발견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 주시기를 바라고 주님께서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같은 기도를 들으실 때 어떤 생각이 드실까요? 돈을 채워주면 그것으로 형제의 삶을 위로하며 건강을 붙들어 주면 그것으로 형제를 위해 봉사하고 높은 지위로 올려주면 그것으로 낮은 곳을 섬기는 삶을 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이든 응답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친구 삼아주신 주님과 동행하는 비결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뿐인 사랑으로 우리를 권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으로 아무런 생명력이 없는 마른 나뭇가지와 같은 우리의 인생을 생명나무 되시는 주님께 접붙여 주셨습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증거하는 것은 우리의 입술이 아니라 우리의 삶입니다. 세상은 자기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나르시시즘(narcissism) 우상숭배와 돈을 사랑하는 맘모니즘(mammonism)에 빠져있습니다. 주님께서 친구삼아 주신 우리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삶을 통해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 뿐 아니라 세상에 생명을 싹틔우는 삶을 시작하길 원합니다. 힘들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끝까지 지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부어주시며 믿음으로 용기낼 수 있도록 힘 주실 것을 믿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측량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영생을 얻었음에도 말 뿐인 공허한 사랑의 삶을 살았던 우리를 돌아보게 하시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이상히 여기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 들이고 오히려 우리의 삶에 사랑이 없음을 이상히 여기며 사랑이 메마른 우리의 마음이 더 황폐해지지 않도록 성령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물 붓듯 부어주시옵소서. 죄의 종 노릇하던 우리를 무한하신 사랑으로 친구삼아 주신 주님을 사랑함으로 형제를 사랑하고 기꺼이 삶을 나누는 삶을 통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이상히 여기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시선을 그동안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앞으로는 어떻게 여기시겠습니까?
2.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주님의 사랑으로써 ‘사랑’을 알았다는 표현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님의 사랑을 알기 전에 생각했던 ‘사랑’과 주님의 사랑을 알고 난 이후의 ‘사랑’은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3.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기 위해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4. 우리를 친구 삼아주신 주님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원수 되었던 우리를 친구 삼아주신 사랑을 받았음에도 제한적인 사랑을 하고 있었던 삶에서 어떻게 돌이키시겠습니까?
5.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삶이라는 사실을 삶 속에 어떻게 적용하시겠습니까?
(작성: 최현준)
요한일서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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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3장
요한일서 3장은 형제 사랑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3장의 핵심 구절은 16절로 형제 사랑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1. 1-6절 하나님을 앎이란 무엇인가
2. 7-12절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난 목적
3. 13-24절 형제를 사랑하라
1. 1-6절 하나님을 앎이란 무엇인가
요한은 3장을 시작하면서 진정한 앎이 무엇인가로 시작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셔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인간의 힘으로 다다를 수 없는 깊은 심연(深淵)이 놓여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지식은 참된 영생과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앎’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1절은 감탄사로 시작합니다. 1절을 다시를 원어에 근접하게 번역해 보면 이렇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 그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사랑은 ‘아가페(ἀγάπη)’로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으로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을 말합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그 사랑이 너무나 감격스러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 사랑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거주하시는 성령의 사람들만 하나님의 큰 은혜를 알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요한 우리가 종말의 때에 예수님처럼 변화될 것을 2절에서 이야기합니다.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연약하고 흠이 많고 부족하지만 다시 새로운 몸을 입게 되면 주님을 닮아 완전한 몸이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종말에 일어날 일에 대해 소망을 갖게 됩니다. 이 소망을 가진 자들은 주님께서 거룩한 삶을 살았듯 우리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3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죄를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는 옛 사람의 죽음, 죄성에 사로잡혀 세상을 탐하는 옛 자아의 죽음을 뜻합니다. 이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죄를 짓지 않고 주님처럼 거룩하기를 끊임없이 갈망하게 됩니다. 요한은 죄를 짓는 자들은 그를 보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한다고 못박습니다.(6절)
여기서 요한이 강조하는 앎이란 방법이나 노하우가 아닌 ‘관계’를 말합니다. 주님과 연결되어 있고,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삶을 ‘앎’이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를 통해 주님과 성도간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요 15:4-5)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2. 7-12절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난 목적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가 죄를 멸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8절 후반부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을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함입니다. 그럼 다시 죄를 지어야 할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살아야 할까요?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롬 6: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바울은 강력하게 외칩니다. ‘그럴 수 없다’ 그렇습니다. 죄를 지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마귀의 자녀들이라고 말합니다.(10절)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신 목적에 반하는 것이며,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쓸모 없게 만드는 악입니다.
3. 13-24절 형제를 사랑하라
ㄱ. 서로 사랑하라.(11, 16절)
하나님을 앎은 어떻게 표현되어야 할까요? 요한은 ‘서로 사랑’이라고 답합니다. 우리는 종종 서로 다툼이나 문제가 생길때 가해자가 있고, 피해자가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복음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네 자신의 관계를 살펴보라고 조언합니다. 요한은 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세상에 다툼 없는 교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크든 작든 어떤 교회도 항상 문제가 있고, 시기와 질투가 있으며, 경쟁과 다툼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문제는 사람들은 종종 가해자와 피해가로 구분하여 가해자는 무조건 사과해야하고, 피해자는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섬겨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3:11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3:23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4:7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4:11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말합니다.
ㄴ.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18절)
‘행함과 진실함으로’는 ‘ἐν ἔργῳ καὶ ἀληθείᾳ’로 ‘행동 안에 그리고 참으로’의 뜻입니다. 의역을 하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진리를 따라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선 16절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다만 실천적 측면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진리는 삶으로 드러나야 진리입니다. 사랑은 실천되어야 사랑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요한은 자신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음에도 궁핍한 형제를 돕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지 못한 자라고 폭로합니다. 사랑은 혀에 있지 않고, 손과 발에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ㄷ. 계명대로 사랑하라.(23절)
사랑의 방법에 있어서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할 때 나의 생각이나 고직이 아니라 ‘주신 계명대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23절을 봅시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리스도인의 생활 법칙은 성경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누구나 사람은 자신이 객관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국 사람은 한국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미국 사람은 미국을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경험이란 것도 어떤 사실에 대해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어제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집에서 조용히 비오는 것을 구경한 사람은 빗소리가 아름답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가 오는 가운데 출근해 일하는 빗소리가 곤욕스럽게 들릴 것입니다. 사실은 진리도 아니고, 객관적 해석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기준 오직 성경이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2번입니다.
문2. 하나님께서 무슨 규칙을 우리에게 주시어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할 것을 지시 하셨는가 ?
답. 신구약 성경에 기재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우리가 그를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할 것을 지시하는 유일한 규칙이다.( 갈 1:8,9 , 딤후 3:15-17 , 계 22:18-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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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일서 3장 주석
요한일서 제 3장
=====3:1
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데테'(* )는 감탄사의 역할을 하는
명령형으로 복수 형태로 사용되었다. 이 복수 형태는 가시적인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
되는 어법이다. 이는 수신자들이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였음을 암시한다(Smalley, Westcott).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
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 ‘어떠한’의 헬라어 ‘포타펜'(* )은 신약
성경에서 대개 놀라움이나 경탄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데(마8:27; 막13:1; 벧후3:11),
본문에서는 ‘어떠한 정도의’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하나님께서 수신자들에게 베풀어 주
신 사랑이 얼마나 풍성한 것인가를 의미한다(Brooke). 한편 ‘자녀’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크나'(* )는 실제적인 부자 관계에서의 자녀됨을 강하게 함축하는 단어
이다. 반면에 사도 바울은 주로 ‘휘오스'(* , ‘아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데 이것은 법적인 부자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이다(Plummer, Wilder).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로써 값없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이 얼마나
놀라우신 사랑인가를 선포하고 있다(Calvin). 요한은 ‘우리가 그러하도다’를 부가하여
수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서 비롯된 것
임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 ‘그러므로’에 해당
하는 헬라어 ‘디아 투토'(* )는 문법적인 연결이 명백하지 않아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혹자는 ‘디아 투토’가 뒷부분의 내용과 연결되어 ‘호티'(*
, ‘왜냐하면’)이하의 절을 설명하는 것으로 본다(Smalley, Stott). (2)혹자는
‘디아 투토’가 앞부분의 내용과 연결되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한다’는 의미로 보고, ‘호티’ 다음에 따라오는 절은 부가적 기능만을
한다고 주장한다(Haas, Marshall). 어느 견해를 취해도 의미상 큰 변화는 없으나 문맥
상 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절이 하나님을 모르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를 모르는
것은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단순히 수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강조
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본성을 공유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한편 ‘그’가 누구
를 지칭하는가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주장한
다(Haas). (2)혹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Bultmann, Stott). (3)혹
자는 예수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Westcott, Briike). 본문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가 어렵지만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
다. 왜냐하면 본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분리할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1:3; 2:1,24). 요한은 세상이 예수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라고 진술하고 있다. 사실 ‘세상에 속한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에 속한 자요
어두움에 거하는 자로서 하나님을 영접하거나 인정하기를 거부한 자이다. 따라서 그들
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은혜를 받아들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을
알 수가 없다.
=====3:2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
나. – 본문은 ‘지금…아직’이라는 종말론적 긴장 관계(eschatological tension)에 놓
여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상태를 나타낸다. 세상이 하나님의 자녀 된 그리스도인을 알
아보든 못 알아보든 간에, 혹은 그리스도인의 현재 모습이 육체의 소욕(所慾)을 완전
히 벗어나지 못했을지라도 분명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이다(Calvin, Stott).
신자의 미래에 대해서는 구원의 영광이 약속되었다. 그러나 비록 현재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특권과 하나님의 성품을 누리며 미래에 주어질 구원이 확실하다
할지라도 장차 되어질 그리스도인의 미래 상태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계시 되지 않았
기에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야 신자는 장래에 자기 자신에게
일어날 구체적인 상태를 알 수 있을 것이다(Stott).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안 파네로데'(*
)에는 주어가 없어서 이를 해석하는데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
자는 ‘그’를 바로 앞 문장의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을 가리키는 비인격적 주어로 보면
서 바로 뒷 문장에 나타난 ‘그’는 하나님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Schnackenburg,
Plummer, Bengel). (2)혹자는 ‘그’를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Stott,
Barker, Bru- ce, Smalley). (1)의 견해는 두 가지 점에서 부당하다. 첫째로, 앞서 언
급한 바와 같이(1절) 본서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를 명백히 구분짓지 않고 있
음을 간과하였으며 둘째로, 이어지는 본문의 논의가 하나님보다는 예수 그리스도 쪽으
로 발전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Smalley). 그러므로 본문에 사용
된 ‘그’는 후자의 견해와 같이 전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
다. 한편 우리가 주와 같을 줄 아는 것이 주의 계신 그대로를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말은 그날에 ‘우리가 새사람을 입고'(엡4:24) ‘주와 같은 영광의 몸의 형체로 변하게
되어서'(빌3:21) 주와 같이 됨을 의미한다(Stott).
=====3: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 ‘소망’의 헬라어 ‘엘피다'(* )
는 바울 서신이나 베드로 서신에는 빈번하게 나타나지만(롬5:4; 8:24; 고후1:7; 벧전
1:3) 요한 복음이나 요한 서신 중에서는 본문에서 단 한 번 나타난다. 그러나 ‘그리스
도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을
이루리라는 확신에 찬 기대’라는 소망의 개념은 2절에서 명백히 설명되고 있다
(Smalley). 따라서 ‘이 소망’은 2절에 나타난 장래의 일들에 대한 종말론적인 소망을
가리킨다(Barker).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 요한은 처음으로 예수의 특징
을 ‘깨끗하심’으로 묘사하고 있다. ‘깨끗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그노스'(*
)는 ‘디카이오스'(* , ‘의로운’)와 거의 같은 의미로 그리스도
의 정결하심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힘써 따라야 할 본보기임을 시사한다(2:1,29;3:7,
Smalley). 한편 ‘깨끗하게 하느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하그니제이'(* )
는 ‘하그노스'(* , ‘깨끗하심’)와 같은 어원을 갖는 동사로 제의적 정결을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출19:10,11; 민8:21; 요11:55; 행21:24). 그러나 본문에서는 시
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거룩한 성품으로서 도덕적인 깨끗함을 의미한다(Law, Stott,
Smalley, Barker).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가진 자는 주의 재림을 맞이하기 위하여
주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마5:48).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 본문은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진술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과 분리하여 자신들은 죄가 없으며 불법을 행하
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요한은 죄를 짓는 사람은 모두가 예외없이 불법을
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 영지주의의 거짓 가르침을 배격하고 있다.
죄는 불법이라. – 여기서 ‘불법'(* , 아노미안)은 문자적으로 ‘율
법을 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요한이 ‘율법'(* , 노모스)이란 용어
를 한번도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본문의 ‘불법’은 율법을 범한다는 의미라
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배반하려는 인간의 본성적인 불법을 의미한다(Barker). 요
한은 자기 자신들이 모든 죄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영지주의자들이 사실상 하나
님을 배반하는 무서운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3: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 ‘죄’에 해당하
는 헬라어 ‘하마르티아스'(* )는 복수형이다. 이는 죄악된 모든 행
위를 포괄하는 개념이다(Smalley, Stott). 한편 ‘나타내신’의 헬라어 ‘에파네로데'(*
)는 부정과거 시상이다. 이것은 과거의 특별한 역사적 사건을 나
타내는 것으로 예수의 성육신이 역사적 사건임을 암시함과 동시에 이러한 역사적인 실
재 사건을 기반으로 해서 예수의 ‘죄를 없애는 사역’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셨으며(요1:29), 모든 죄
를 친히 자기 몸에 짊어지심으로써 우리 죄를 없이 하셨다(사53:11,12; 히9:28; 벧전
2:24, Stott).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 ‘죄가 없다’는 말씀은 3절의 ‘깨끗하심’과 2:29; 3:7의
‘의로우심’과 동일한 의미이다. 예수의 무죄성은 초대 교회의 케리그마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신약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고후5:21; 히4:15; 벧전1:19). 한편 본문
에서 사용된 헬라어 동사는 ‘에스틴'(* , ‘~이다’)으로 현재형이다. 이것
은 예수께서 지상 사역 기간 동안만 죄로부터 자유로우셨던 것이 아니라 영원히 무죄
하심을 암시한다(Smalley).
=====3: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
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 본문은 1:8,10의 진술과 모순되는 듯이 보인다. 이에
대해 네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주 안에 거하는 자의 인격에 주목하여 그리스도
인은 고의적으로 범죄를 저지르지 아니하는 것으로 해석한다(Wesley). (2)혹자는 요한
이 신자의 삶의 원리를 선포한 것으로 보고 ‘범죄치 아니함’을 신자의 이상적 특징으
로 해석한다(Alford, Calvin). (3)혹자는 습관적이고 지속적인 범죄를 저지르지 아니
하는 것으로 해석된다(Lange, Smith, Barker, Westcott, Stott). (4)혹자는 주 안에
거하는 자는 원리상 이미 범죄하지 않는 자이지만 실제상 아직 범죄하는 자라고 본다.
즉 그리스도인이 현재 긴장과 역설의 관계 속에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Smalley, Schn-
a ckenburg). 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두 가지 견해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세 번째 견해의 경우 ‘범죄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마르타네이'(*
)는 현재형으로서 동작의 습관적이고 지속적인 상태를 묘사해 주기 때문이며, 네
번째 견해의 경우 루터(Luther)가 ‘그리스도인은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고 말한 것
과 마찬가지로 주 안에 거하는 자는 범죄치 아니하는 동시에 범죄한다고 이해할 수 있
기 때문이다(Smalley). 앞 절에서 진술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죄와 상관
없는 깨끗한 분이시기에 그분 안에 거하는 자는 죄와 상관없는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
다. 만약 죄를 범한다면 그는 회개함을 용서함을 받고 불법의 생활을 버려야 한다. 그
러나 그가 지속적이며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향하기보다 죄를 좋아하며 죄 안에 거하길
즐겨한다면 그는 완전히 깨끗하신 그리스도를 알거나 본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알지도, 보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요5:37,38; 8:19; 14:7,9; 요삼1:11,
Stott, Barker).
=====3: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 본문은 수신자 내에 있던 영지주
의를 전파하는 거짓 교사들을 염두에 둔 진술이다. 요한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은 하나
니의 비밀스런 지식, 즉 영지(靈智)를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유일한 길이
라고 주장하였으며 영지를 깨달은 자는 육신에서 자유로워져 도덕적인 방종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의 신학과 윤리의 가르침은 요한
당시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미혹시켰다. 그래서 요한은 사도들이 전하여 준 복음 이
외의 것을 가지고 미혹하는 자들을 멀리하며, 거절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 본문은 2:29의 반복이다. 여기
서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의로움의 동기와 근거를 나타낸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서 의로워질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가능함을 시사한다. 따라서 본문은 의를 행함이 조건이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
게 된 자로서 그의 의로움을 행위로 보여 주어야 함을 의미한다(Bruce).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 본문은 7절
하반절과 정반대되는 내용으로서 대조를 이룬다. 의를 행하는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다. 반면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 속한다. 요한은 이러한 대조법을 사용하여서 수신
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누구에게 속하느냐’란 질문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며 동시에
영지주의자들이 방종을 통해 범죄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 누구에게 속하였는가를 분별
할 수 있도록 한다. 한편 요한은 본문에서 마귀의 기원에 대해서는 어떠한 암시도 주
지 않으며, 단지 죄의 기원이 마귀에게 있다는 사실만을 말한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뱀을 암시하는 듯하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하는 자로서 진리
가 그 안에 전혀 없기에(요8:44) 속이는 자이며 사람들로 범죄하게 한다. 이러한 죄의
기원에 대해 바울이 아담에게까지 소급시킨 것과 달리(롬5:12-19), 요한은 그보다 더
욱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Westcott).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 ‘마귀의 일’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람들을 미혹시켜서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다(창3:1-6). 이러한
마귀의 일을 파괴하고 사람들이 오직 하나님만을 향하도록 하게 하기 위해 그르스도께
서 세상에 오셨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죄인을 어둠에서 구하셔서 하나
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 오셨다(5절; 히9:28; 벧전2:24). 요컨대 그리스도의 오심
은 우리의 죄를 없애고 동시에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함인 것이다(Plummer).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 본절은 6절의 반복이다. 요한은
1:8,10에서 믿는 자들이 죄를 지을 가능성을 언급하였으나 본절에서는 믿는 자들이 범
죄치 아니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본절은 6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습관적으로
마귀와 같이 범죄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에 대하여는 본문이 수신자들 사이에 있
던 영지주의자들을 향한 경고인을 전제로 할 때 자연스럽게 해석된다. 요한 당시의 영
지주의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었다. 하나는 영지를 깨달은 자는 육신에서 벗어나 완전
한 자가 되었으므로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죄가 영지를 깨
달은 자에게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 없으므로 범죄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는 부류이다. 요한은 전자의 영지주의자들에 대해서는 누구나 범죄함을 역설하였고
(1:8,10), 후자의 영지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신자들은 범죄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역설
하고 있다(6절).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
라. – ‘하나님의 씨’에 대한 견해는 다섯 가지이다. (1)혹자는 신적인 생명의 원리라
고 주장한다(Smith, Marshall). (2)혹자는 집합적 개념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들 전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ohlenberg, Stott). (3)혹자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Oecumenius, Theophylactus). (4)혹자는 말씀 또는 복음이라고 주장한다(Augustine,
Dodd). (5)혹자는 성령이라고 주장한다(Calvin). 다섯 가지 견해 중 마지막 두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Smalley).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말씀이 심기워 있음(시119:11; 렘
31:33)과 성령께서 내주하심(롬8:11; 고전3:16)은 동시적이고 불가분리적이다. ‘하나
님의 씨’ 즉 말씀과 성령이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에 거할 때 그 그리스도인은 범죄하
지 않게 된다.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 하나님은 천지 만물의
창조주시며 모든 인간들을 낳으신 아버지이시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에서는 모든 인간
들의 아버지가 아니다. 마귀의 자녀들도 있다(요8:44).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들
과 마귀의 자녀들이 섞여서 살고 있다(마13:24-30). 자녀들이 부모를 닮아 가듯이 하
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닮고, 마귀의 자녀들은 마귀를 닮는다(Stott, Bruce).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
하지 아니하니라. – 저자는 하나님의 자녀인가 마귀의 자녀인가를 판별하는 시금석으
로 ‘의와 사랑’을 제시한다. 의와 사랑이 없는 자는 자기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스
스로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마귀에게 속한 자임을 드러낸다.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
에서든 아니면 타인과의 관계에서든간에 ‘온전함’을 의미하며 ‘사랑’은 타인에 대한
의로움을 뜻한다(Westcott, Plummer). 이러한 ‘의와 사랑’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깊
은 연관성을 갖고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이 닮아야 할 하나님의 본성이다.
=====3:11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 ‘사랑할지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포멘'(*
)은 현재형으로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사랑이 지속적인 것임을 시사
한다(Smalley).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 ‘처음부터’는 문맥상 요한의 수신자들이
복음을 처음 들었을 때를 의미한다. 그러나 요한은 틀림없이 복음의 본질이 사랑이며
(요3:16; 15:12; 눅10:27; 고후13:13) 사랑이 태초의 창조 원리에까지 미친다는 사실
(요17:24; 요일4:16)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한편 ‘소식’에 해당하는 헬라어 ‘앙겔
리아'(* )는 1:5와 동일한 단어이다. 1:5에서의 ‘소식’은 교리적 내용
을 담고 있어 하나님이 빛이심을 드러내는 반면 본절에서의 ‘소식’은 윤리적 내용을
담고 있다(Stott). 그 윤리적인 내용은 ‘복음의 본질인 동시에 근원적인 요구인 사랑
의 실천을 권면하는 것’이다.
=====3:12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 저자는 8절과
10절 내용의 연장선상에서 마귀의 자녀의 모델로 가인을 제시한다. 요한이 가인을 악
한 자에게 속한 사람의 본보기로 제시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로 가인은 동생 아벧의 의로움을 시기하여 죽임으로 자기 자신이 마귀에게 속하였음을
스스로 입증하였다(Burce). 둘재로, 요한 당시의 한 이단 종파인 에비온주의자들은 채
식주의자들이었다. 요한은 그들에게 고기를 드린 아벧은 열납되고 농산물을 드린 가인
은 거부되는 사건을 제시함으로써, 율법적인 채식주의보다는 사랑의 계명에의 순종이
우선임을 보여주려 한 듯하다(Smalley).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 창
4장에 기록된 사건에서는 가인의 살인 동기가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 기
록된 가인에 대한 언급(히11:4; 유1:11)을 통하여 추론해보면, 가인은 믿음과 순종과
형제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본문에서 요한은
다른 어느 성경보다도 분명한 살인의 동기를 제시한다. 그 동기는 동생 아벧의 의로움
에 대한 시기이다. 마귀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물질적 축복이나 안녕보다는
의로움 자체를 더욱 시기하고 증오한다(Stott). 이런 의미에서 가인은 자신의 살인 행
위로 말미암아 마귀에게 속한 자임을 스스로 드러내었다.
=====3: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 전후 문맥상 세상과 하
나님의 자녀와의 관계는 가인과 아벧의 관계에 비유될 수 있다(Law). 하나님의 자녀와
세상의 대립은 아벧-가인, 이삭-이스마엘, 야곱-에서를 통하여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
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요한은 ‘미워하거든’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세이'(*
)를 현재 시상으로 사용함으로 암시하고 있다.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의롭다는
사실만으로 미워하므로(12절) 양자간의 대립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세상의
증오는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이김에 기초하여 넉넉히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다(요16:33; 요일4:4; 5:4, Bruce).
=====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 본문
에서 요한은 생명으로 들어가기 위한 조건으로서 형제 사랑을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
라, 생명으로 들어간 자의 증거로서 형제 사랑을 논하고 있다. 사랑은 율법의 대강령
이요(마22:34-40),율법의 완성이요(롬13:10),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의 최고 표현이
다(요13:35; 고전13:13). 그러므로 비록 세상이 영생의 근거는 아닐지라도 형제 사랑
이 없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Calvin, Bruce).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 ‘사랑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폰’
(* )에는 목적어가 없다. 이 사실로 인해서 본문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
하다. 하나는 ‘형제’를 목적어로 보아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로 해석하는 것이
다(Stott). 다른 하나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다(Plummer, Smalley).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해야 할 대상은 제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16절; 2:2). 한편 ‘거하느니라’의 헬라어 ‘메네이'(* )는 현재형
으로 사랑치 아니하는 자의 영적 죽음의 상태가 지속됨을 암시한다.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랑을 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과거 상태처럼 지속적으로 죽음과 진노하에 있는
상태이기에(엡2:2) 사망으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사망에 거하고 있는 상태이
다.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자니. – 요한은 ‘사랑하지 않음’의 개념에서
‘미워함’의 개념으로 발전시켜 진술하고 있다. 본문은 분명히 12절을 반영한 것으로
세 가지 즉 ‘사랑하지 않음’과 ‘미워함’ 그리고 ‘살인’이 동일한 것임을 시사한다. 즉
사랑하지 않는 자는 미워하는 자요,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이다(Plummer). 그러나
여기서 요한이 살인자의 회개와 사죄 가능성을 부인한다고 볼 수는 없다. 예수께서도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의 사죄를 위해 기도하셨기 때문이다(눅23:34, Smalley, Stott).
단지 요한은 본문에서 미움이 잠재적 살인이라는 사실, 즉 살인이 미움과 시기에서 비
롯된다는 사실과 살인하는 자의 현재는 영생과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다.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 ‘영생
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번역된 헬라어 ‘우크 에케이 조엔 아이오니온 엔
아우토 메누산'(*
)운 문자적으로 ‘그 속에 거하는 영생을 가지지 못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여기
서 ‘가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케이'(* )는 현재형으로서 ‘영생을 가질
수 있는 지속적인 능력’을 뜻한다(Haas). 이것은 살인하는 자의 마음속에 미움이 가득
차 있어서 영생을 소유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미움에서 비롯된 살인과 사랑으
로 드러나는 영생이 서로 상극임을 시사한다.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 ‘알고’에 해
당하는 헬라어 ‘에그노카멘'(* )은 완료형이다. 이 단어는 이 서
신의 다른 곳에서는 거의 현재형으로 쓰였으나(2:5,18,20; 5:15) 본문에서는 특히 완
료형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우리가 알게 된 것이 특별한 역사적 사건에 근거하고 있
기 때문이다. 요한은 15절에서 미워하는 자의 표본으로서 가인을 내세운 뒤 본절에서
사랑하는 자의 표현으로 그리스도를 언급함으로 자신이 강조하고 있는 사랑이 어떠한
것인가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따하니라. –
요한은 상반절에서 자기 희생적 사랑의 본보기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제시
함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본받아 자기 희생적
사랑을 행하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강조한다(2:6). 이는 예수께서 친히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상토하는 것으로(요15:12,13)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행해야 할 사랑이 자기 부정임을 시사한다.
=====3: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
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 ‘재물’의 헬라어 ‘비온'(* )은 단순
한 재물이 아니라 ‘삶의 수단으로서의 재물’을 의미한다(막12:44). 또한 ‘보고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로레'(* )는 그냥 한번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오
랫동안 지켜보는 상태’를 가리킨다(Smalley). 본절에서 요한은 생활에서 충분히 실행
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랑의 예로 최소한의 생활조차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제
시하고 있다. 요한은 생활이 어려운 형제를 보고도 그의 굽핍함을 고와주지 않면 하나
님의 사랑이 있다고 말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한편 ‘하나님의 사랑’에 대
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4:10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랑으
로 해석한다(Plummer) (2)혹자는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으로 해석한다(Bro-
oke, Bengel, Alford). (3)혹자는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같은 사랑으로 해석한다(Law,
Marshall). 본절의 중심 사상이 그리스도의 사랑하심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사랑하는자
는 것이기 때문에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 ‘말
과 혀’는 같은 의미로서 실천이 없는 사랑을 의미한다. 이와는 달리 ‘행함과 진실함’
은 실천하는 사랑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한다(Smalley). 즉
‘행함’은 사랑의 역동적 측면을 나타내고, ‘진실함’은 사랑의 질적 측면을 나타낸다.
요한은 본절에서 사랑의 실천을 선언(약2:15-17)함으로써 이제까지 논해온 것, 즉 하
나님에게서 난 자마다 의와 사랑이 있어야 함을 요약하고 있다.
=====3: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 ‘이로써’가 가리키는 것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다음절을 가리킨다
고 주장한다(Nauck, Brooke). (2)혹자는 앞에 언급된 내용과 뒤에 언급될 내용 둘 다
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3)혹자는 앞에서 언급된 10-18절까지의 내용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arker, Smalley, Stott).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문맥
상 가장 타당하다. 한편 ‘굳세게 하리로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소멘'(*
)에 대하여는 세 가지 해석이 있다. (1)’확신케하다’, 이 의미로 해석하려면
목적어가 있어야 하는 데 목적어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바로
앞 문장인 ‘우리가 진리에 속함’을 목적어로 보는 견해와(Plummer) 2 20절 초두의
‘호티'(* , ‘왜냐하면’)가 이끄는 절을 목적어로 보는 견해이다(Bruce). 그러
나 양자 모두 무리한 문법적 연결을 시도하고 있다. (2)’설득시키다’. 이것은 의미상
본문에 부적절하다. (3)’안심시키다’. 이 의미로 해석할 경우 ‘우리 마음의 두려움과
염려’라는 목적어가 생략된 것으로 본다(Westcott). 비록 만족스러운 해석은 되지 못
하나 그래도 세 가지 의미중 마지막 의미가 타당성을 지닌다(Stott, Smalley). 본절에
서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진리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
함과 동시에 20절과 연결하여 주 앞에서 두려움없이 담대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3:20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
을 아시는 하나님일까보냐. – 본절에서 두 번 사용된 ‘호티'(* , 왜냐하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대해서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첫번째 ‘호티’를 명사절
을 이끄는 접속사(that)로 보고, 두번째 ‘호티’는 불필요한 반복으로 간주하여 생략한
다. 이 해석은 20절 전체를 19절의 ‘페이소멘'(* , ‘확신케 하다’)
이란 동사의 목적어로 본다(Bruce). (2)혹자는 첫번째 ‘호티’를 ‘왜냐하면’으로 해석
한다. 이 경우 19절의 동사 ‘페이소멘'(* , ‘안심시키다’)의 목적어
는 생략된 것으로 본다(AV). (3)혹자는 첫번째 ‘호티'(* )를 ‘호'(* )와 ‘티’
(* )로 분리시켜서 관계대명사 중성 명사로 보고, ‘에안'(* , ‘…이면’)과
합쳐서 ‘…할 때마다’라는 의미로 본다. 이때 두번째 ‘호티’는 종속절을 이끄는 접속
사로서 ‘왜냐하면’의 뜻이 된다(Stott, Smalley).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
장 타당한 듯하다. 요한은 본서에서 서로 대조되는 구문을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1:9,10; 2:10,11; 3:8,9) 본절 역시 21절과 대립되는 구문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보냐. – 본문에 대해서는 두 가
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묘사라고 주장한다(Alford,
Wohlenberg).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우리 자신도 우리 마음을 보시면 책망할 것이
너무 많을 것이므로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2)혹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대
한 묘사라고 주장한다(Brooke, Luther).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두 다
아시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우리 마음을 책망할 때마다 오히려 위로를 받는다는 의미
이다. 문맥상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3:21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 문장의 형식상 전절과 본절은 조
건문으로서 대조를 이루지만 내용상은 본절이 전절의 결과에 해당한다. 본문은 설사
양심에 거리낌이 있어서 책망할 것이 있을지라도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
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히 용서해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면,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책망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Bruce).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 위에서 담대함은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서 항상 담대함을 가질 수 있다(히10:19).
=====3: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 ‘구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토멘’
(* )과 ‘받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람바노멘'(*
)은 모두 현재 시상이다. 이는 계속되는 기도와 계속되는 응답의 경험을 암시한다
(Stott).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응답하신다는 사상은 신약 여러 곳에 나타난다(마
7:7,8; 18:19; 요11:41,42; 15:7). 그러나 이 응답에 대한 약속에는 선행 조건이 있
다. 모든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
다(요15:7, Smalley).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 그리스
도인들이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은 하나님 앞에 내세울 말한
공적이 아니라 신자의 마땅한 의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 기도 응답의 조건이 되는 것처럼 말한 것은 하나님
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됨을 드러내는 외면적인 표현이기 때문이
다(Law, Stott). 예수께서도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일을 행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심을 아셨다(요8:28,29; 11:42).
=====3: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
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 전절에서는 ‘계명들'(* , 엔톨
라스)이라고 하여 복수 형태를 취하는데 본절에서는 ‘계명'(* , 엔톨레)
이라고 하여 단수 형태를 취한다. 이는 본절의 두 가지 내용인 ‘믿음’과 ‘사랑’이 사
실은 불가분리적인 하나의 계명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여기서 ‘믿고’의 헬라어 ‘피스
튜소멘'(* )과 ‘사랑할 것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포
멘'(* )은 시상이 서로 다르다. 즉 ‘피스튜소멘’은 부정과거형으로
서 ‘단번에 이루신 예수의 역사적 속죄 사역'(히9:28)을 믿는다는 점을 강조하며 ‘아
가포멘’은 현재형으로서 ‘형제 사랑이 변함없이 지속적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믿음과 사랑은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믿음은 사랑의 근거요 사랑은 믿
음의 증거이다.
=====3:24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 헬라어 본
문에는 두 번의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아우토스'(* , ‘그’)라는 인칭
대명사로 나타난다. 이 ‘아우토스’는 19-23절까지 계속해서 아버지 하나님을 지칭했다
는 점을 고려하여,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Plummer, Stott,
Smalley). 그러나 사도 요한의 기독론(Christology) 자체가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의
구분을 뚜렷하게 짓지 않고 오히려 상호교환적으로 사용하며, 요15:1-7의 말씀이 강하
게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를 가리킬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다. 또한, 하나님이 예수 안에 예수가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요17:21) 내용상으
로는 ‘주’가 하나님이든지 예수이든지 같은 의미이다. 앞 절에서 언급된 두 가지 계
명, 즉 믿음과 사랑의 계명을 잘 지키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 안에 거
하며, 하나님도 역시 그 안에 거하신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 본문에서 믿음과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자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것을 알 수 있
는 증거로 성령이 제시된다. 성령은 그리스도인이 주 안에, 주가 그리스도인 안에 거
하신다는 약속의 확실성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保證)이다. 23,24절의 연결이 18,19절
의 연결처럼 ‘우리가 사랑하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 안다’고 하지 않
고 성령을 등장시킨 점은 의미가 있다. 아마도 저자는 주 안에 거하기 위해 그리스도
인이 행해야 할 ‘사랑’이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는 ‘선
물’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러한 성령은 그리스도인에게 각종 은사를 주셔서(갈
5:22,23)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의롭게 행하고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
(Stott). 그때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안
에 내주하심을 알게 된다.
요한일서 3장 (개역개정/쉬운성경, 자비교회 성경통독)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요일]3:1 아버지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를 그분의 자녀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정말로 그분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요일]3:2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우리는 분명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아직은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있게 될지 알 수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때에는 우리의 모습이 그와 같을 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참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요일]3:3 예수 그리스도는 깨끗하신 분이십니다. 적어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와 같이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지켜야 할 것입니다. [요일]3:4 죄를 짓는 자는 하나님의 법을 깨뜨리는 사람입니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며 사는 것과 같습니다. [요일]3:5 여러분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는 죄를 없애기 위해 오셨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십니다. [요일]3:6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습니다. 만약 그가 계속하여 죄를 짓는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진정 이해하지 못한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를 알았다고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요일]3:7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어느 누구라도 여러분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의를 행하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요일]3:8 마귀는 태초부터 지금까지 죄를 지어 오고 있습니다. 계속하여 죄를 짓는 사람은 마귀에게 속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바로 이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요일]3:9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그의 자녀로 삼으셨을 때, 그 사람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삶의 씨가 그의 안에 머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계속하여 죄를 짓고 살 수 없습니다. [요일]3:10 이것으로 우리는 누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누가 마귀의 자녀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올바른 일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리고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요일]3:11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어 온 말씀은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일]3:12 악한 자에게 속했던 가인과 같이 되지 마십시오. 가인은 자기 동생을 죽였습니다. 자기 동생을 죽인 이유는 자기는 악한 일을 했고, 동생은 선한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요일]3:13 형제 여러분, 이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을 미워할 때, 놀라지 마십시오. [요일]3:14 우리는 죽음을 벗어나 생명으로 옮기웠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형제들을 서로서로 사랑함으로써 알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 가운데 거하는 사람입니다. [요일]3:15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자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살인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요일]3:16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의 생명을 주심으로써 우리는 진실한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형제를 위하여 우리 생명을 내어 줌이 마땅합니다. [요일]3:17 어떤 한 믿는 사람이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다 가질 수 있을 만큼 부자라고 합시다. 만약 그가 가난하고 필요한 것들을 갖지 못한 형제를 보고도, 그 형제를 돕지 않는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는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요일]3:18 자녀들이여, 우리는 말로만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사랑은 진실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행함으로써 그 사랑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요일]3:19 이를 통해 우리가 진리에 속하였음을 알 수 있게 되며, 하나님 앞에서도 평안할 수 있게 됩니다. [요일]3:20 우리의 양심이 우리를 책망하는데, 우리의 양심보다 크시며, 또한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더 우리를 책망하시겠습니까? [요일]3:21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만약 우리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요일]3:22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들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지켰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했기 때문입니다. [요일]3:23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분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3-4절, 9절 말씀 묵상
요한일서 3장 3-4절, 9절 말씀 묵상
이영만 목사 0 2020.01.24 18:42
요한 일서 3: 3-4 , 9
3 주를 향하여 이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9. 하나님으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들은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 가운데 우리안의 어둠이 물러가게 됩니다. 우리를 자녀로 인정해 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셔서 깨끗하게 하여주셨는데 어떻게 다시 우리 자신을 더럽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자녀로 연결된 우리들은 더이상 세상의 것들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 한분으로 만족하여야 한다고 우리는 스스로 선택을 한 것 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속에 없는 것 입니다.
이 세상도 지나갑니다 우리의 정욕도 다 지나갑니다
나이가 들면 우리들의 욕심도 줄어 듭니다.
미국의 일반 사회조사 결과에 의하면 행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5대 요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가족관계 2. 재정 3. 일 (보람있는 일) 4. 공동체와 친구 5. 건강
선진국의 경우 행복감에 영향을 주는 요인 중 물질적 요인의 비중이 약한 반면 비 물질적인 요인들의 비중이 큰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제보다 관계가 더 행복에 중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족관계, 공동체 친구는 모두 관계 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 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관계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관계가 더 중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 26-27.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참 행복은 영혼의 만족에 있습니다. 영혼이 만족하면 범사가 다 잘 되고 강건하게 됩니다.
요한 삼서 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우리 인간은 존재의 불안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피조물의 한계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영생을 약속하여 주신 하나님 안에서의 평안은 우리들이 추구하는 행복을 뛰어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씨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드리며 평안을 누리시기를 간구 드립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 (요일 3:1-24절)
▣ 설교 –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
말씀 : 요일 3:1-24절
우리는 2장에서 신자의 삶은 빛 가운데 행하는 삶임을 배웠습니다. 빛 가운데 행하는 삶이란 형제를 사랑하는 삶입니다. 오늘 제 3장에서는 우리가 마땅히 형제를 사랑해야 할 절대적인 이유와, 형제를 사랑하게 될 때 누릴 수 있는 영적 축복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신앙 공동체내에서의 사랑의 중요성을 깨닫고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첫째,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1절)
사도 요한은 2장 28절에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생각은 마지막 날에 확실히 이루어질 신자의 구원의 완성과 이를 가능케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1절 앞부분을 보십시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보라!’는 감탄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보여 준 어떤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크고 놀라운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진노의 심판 아래 있는 죄인들을 용서해 주는 용서의 사랑이요, 또한 영원한 파멸로부터 구원하는 구원의 사랑입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사형선고를 받고 일생동안 창살없는 감옥에 갇혀 비참한 인생을 살다가 결국에는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은 한번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선악간에 심판을 받고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한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둘째 사망입니다.(계 21:8절) 하나님은 이런 인생을 불쌍히 여기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 죄값을 다 치르시고 아무 값없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해 주신 것만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신 후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죄의 노예를 하나님의 보배로운 자녀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신분상승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사랑과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답답하고 힘들고 괴로울 때마다 점쟁이에게 가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나아가 “아버지여” 하며 모든 마음의 괴로움을 다 털어놓고 기도함으로써 참된 위로와 안식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에 아끼시고 귀히 여기시고 그 인생을 책임져 주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또한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쓸모없게 되었을 때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채찍으로 때리시고 쓰실만한 사람으로 훈련시켜 주십니다. 더 나아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십니다.(벧전 1:3,4절)
실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사랑받는 자녀로 삼아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사랑을 넘치도록 부어 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체험한 사도 요한은 감격하여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근거요 원동력이 됩니다.
1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엄청난 신분을 소유하고 있지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함부로 대하고 조롱하고 핍박합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영적 무지 때문입니다.
2. 둘째, 하나님의 자녀의 희망 (2-3절)
우리가 법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하나님의 자녀다운 내면성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의 법도를 좇아 살지 않고 하나님의 법도를 좇아 살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신자의 순결을 지키며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삶을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정욕과 욕심을 좇아 사는데 나만 순결하고 진실된 삶을 사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처럼 느껴집니다.
세상은 바르고 정직하게 살면 손해 본다는 생각이 팽배하게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순결하고 진실되고 바르고 정직하게 산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부패한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깨끗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2,3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에 관해서는 사도 요한도 완전히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음 세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1)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은 풍부합니다.
“그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막 13:26절)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절)
예수님은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재림하십니다. 그러나 그 시기는 아무도 모릅니다.
(2) 둘째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게 되면 그와 같이 변화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의 영혼은 구원을 얻었지만 육신은 아직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 육의 몸 때문에 죄의 소욕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탄식합니다. 우리 믿는 자들의 간절한 소망은 이 육의 몸마져 온전히 구원을 받아 완전한 자유에 이르는 것입니다.(롬 8:23절) 이 육의 몸이 구원받아 영화롭게 되는 것을 ‘영화'(Glorification)라고 합니다.
이 영화는 예수님의 재림과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그때 우리의 육의 몸은 우리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이 죽지 않고 썩지 않고 강하고 신령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됩니다.(고전 15:42-44절) 그때는 다시 죄의 소욕에 시달리지 않게 됩니다. 약하고 추하고 욕되고 죽고 썩고 부패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몸이, 강하고 신령하고 죽지않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된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 변화는 너무나 놀라운 것이어서 믿기가 힘들지만 믿어야 합니다.
(3) 셋째로, 우리의 몸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어 주님과 대면하며 자유롭게 교제를 나누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이 무엇일까요? 원하는대로 물질을 펑펑 써 보는 것일까요? 높은 지위에 않아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러보는 것일까요?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 백년 사는 것일까요? 이러한 축복은 물질적이고 현세적이고 일시적이어서 참된 축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은 창조주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에덴이 에덴일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환경 때문이 아닙니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을 그 중심에 모시고 그 음성을 들으며 자유롭게 교제를 나눌 수 있다는데 있었습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때만이 그 영혼이 진정으로 만족을 얻고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인간이 불행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과 관계성이 끊어지게 되어 에덴을 상실하게 된데 있습니다. 에덴을 상실한 인간은 그 무엇을 하던지 행복을 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하사 죄 가운데서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다시 하나님과 관계성을 회복하여 창조주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육의 몸을 입고 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행복을 누리고 있지만, 예수님이 재림하심으로 우리의 몸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회복하게 되면 그때는 완전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절)
사랑하는 사람끼리 얼굴을 마주 보고 산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인 인간이 영화로우신 창조주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며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행복의 극치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 믿는 자들만이 간직하고 있는 소망입니다.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참된 희망이 있을 때 우리는 부패한 이 시대와 타협하지 않고 순결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셋째, 범죄에 대한 경계 (4-12절)
4-9절 사이에는 ‘죄’라는 단어가 무려 10번이나 반복되어 나옵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사도 요한은 4절에서 죄를 불법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불법이란 말은 죄가 죄됨을 드러내는 구약의 율법을 상기시킵니다. 웨스터민스터 소요리 문답을 보면「죄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불복종, 즉 위반」입니다. 죄란 단순히 하나님이 계시하신 율법을 범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자 하는 불법정신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죄는 하나님께 대한 고의적인 반항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떠나 자신이 원하는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의 성향입니다. 그래서 죄는「자기 중심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자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알더라도 순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를 회개하되 자기 중심성을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중심적인 자, 이웃 중심적인 자가 되기에 힘써야 합니다.
5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리스도의 사역은 ‘죄’를 없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물이 되사 죄인을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써 근본적으로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 죄를 없이 하는 일은 죄없으신 분만이 할 수 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죄를 없이하셨다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당연히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한 생활을 해 나가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그는 분명히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셈이 됩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한다고 하였고,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또 9절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는 죄가 발붙일 수 없다고 강력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여기서 ‘하나님의 씨’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거할 때 범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까? 과연 그렇습니까? 요한은 이미 1장 10절에서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요한의 말에 모순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여기서 우리는 “범죄하지 아니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구절은 난해한 구절 중의 하나로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어떤 견해는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조건하에서만 성취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견해는 6절은 해석이 가능할지 몰라도 9절은 불가능합니다. 9절은 어떤 특정한 그리스도인을 말하지 않고 모든 그리스도인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견해는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죄를 지어도 고의적인 죄는 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죄를 범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진정한 뜻은「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짓되 지속적이며 습관적인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헬라어 동사의 시제에 의해 뒷받침 됩니다. 6절과 9절에서 죄를 짓지 아니한다고 할 때의 시제는 모두 현재 시제입니다. 헬라어에서 현재 시제는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NIV에서는 “No one who lives in him keeps on sinning”(6절) “No one who is born of God will continue to sin”(9절) 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 말씀은「무한정 죄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지을 수 있고 또 실제로 종종 죄를 짓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무한정 죄안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의 세력권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바로 아래 신음하고 있다가 하나님의 크신 권능으로 말미암아 출애굽하여 완전한 자유인이 된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출애굽하였을 때 바로가 더 이상 그들에 대하여 권리 주장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속에 남아 있는 노예근성으로 인해 그들은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되었지만 과거 죄악된 습관이 남아 있어서 자신도 원치 않게 자주 죄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정욕을 좇아 행하던 사마리아 출신들은 사마리아끼가 남아 있고, 이기적인 세리 출신들은 세리끼가 남아 있고, 의존적이고 무기력한 중풍병자 출신들은 중풍끼가 남아 있습니다.
이런 끼를 빼기 위해서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믿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죄에서 벗어나 거룩함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 불신자들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죄가 쌓여서 못쓰게 되다가 결국에는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7,8절은 아무도 우리를 미혹하지 못하도록 배후에 역사하는 마귀와 싸워야 함을 말해 줍니다. 미혹이란 분별력을 흐리게 하여서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귀는 의심과 불신과 두려움을 심어서 복음신앙을 무너뜨리고 자기의 종으로 삼고자 합니다. 우리의 대적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벧전 5:8절) 그러므로 근신하여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근본적으로 마귀의 일을 멸하셨기 때문입니다.
10-12절에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대조되어 나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하지만, 마귀의 자녀는 의를 행치 아니하고 형제를 미워합니다. 가인과 아벨은 그 좋은 예가 됩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은 어쩌다가 실수로 죽인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동생의 행위는 의롭고 자신의 행위는 악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볼 때 살인이라는 행위는 마음의 미움과 시기심과 질투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마 5:21,22절)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에서부터 일어나는 형제에 대한 미움과 시기심과 질투심을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4. 넷째, 진실한 사랑 (13-24절)
사도 요한은 이제 진실된 사랑이 무엇이며, 진실된 사랑을 할 때 누릴 수 있는 축복이 무엇인가를 말해 줍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신자가 믿음으로 의롭게 살 때 세상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존경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불의가 드러나기 때문에 핍박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믿는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어두움이 빛을 싫어하는 것과 같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14절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미워한다고 해서 우리도 같이 미워해서는 안됨을 말해 줍니다. 만일 같이 미워한다면 우리도 그들과 꼭 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신자의 무기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게 될 때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게 됩니다. 형제를 미워하게 되면 사망의 세계에 거하게 되지만, 형제를 사랑하게 되면 생명의 세계에 거하게 됩니다. 사망의 세계는 허무의 세계요 고통과 슬픔과 절망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세계는 기쁨과 희망과 빛의 세계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고,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증오심과 복수심이 있는 곳에 죽음이 있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니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게 됩니다.(15절)
16절은 참된 사랑이란 무엇이며, 우리가 형제를 사랑해야 할 절대적인 이유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사랑이란 함께 한곳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랑이란 TV 채널권을 양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랑을 감각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어령 교수는 미래는 감각과 정이 중시되는 ‘필링의 시대’, 감각과 이미지가 중시되는 ‘패션의 시대’, 생명 존중과 섬세함의 여성문화가 존중받는 ‘피메일의 시대’가 역사의 새 장을 열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감각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매우 강합니다. 그래서 사랑도 감각적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이란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참된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역사적 사실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이를 잘 말해 줍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사랑은 먼저 죄인을 찾아 오신 선수적인 사랑이요,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신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또한 무조건적으로 죄인을 용서하신 용서의 사랑이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또한 존재 자체를 귀히 여기시고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시는 사랑입니다. 과거 우리는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고귀한 목숨을 버리심으로써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내 힘으로 사랑할 수 없는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께로부터 값없이 크신 사랑을 받았으므로,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여기서 마땅하다는 것은 헬라어로 ‘오페이로’로서 ‘빚을 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우리가 형제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은 선심을 베푼다거나 어쩔 수 없이 의무로 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빚을 갚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진 자로서 이 빚을 형제에게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17,18절은 사랑이란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해서 거창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임을 말해 줍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이란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합니다. 행함이란 실천이 없는 것과 대조되는 말이고, 진실함이란 거짓과 대조적인 말입니다. 진실함이란 거짓이 없는 순수한 사랑을 말합니다. 이는 실천하더라도 실천하는 동기가 잘못될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자선사업을 하더라도 순수하게 형제를 도와 주고자 하는 마음보다 자기 이름을 드러내거나, 어떤 유익을 위해서 하기 쉬운 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볼 때 사랑이란 재물을 가지고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베풀고 섬기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누고 베풀고 섬기는 있습니다.
「 미국의 찰스 피니라는 사람은 공항 면세점을 경영하면서 번 돈을 13년동안 무려 5천억원 이상을 익명으로 자선단체와 병원에 기부해 왔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는 집과 자동차도 없는 청빈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선한 일을 한 것이 어느 기자의 추적으로 밝혀졌는데 이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돈이 매력적일 수 있겠지만 누구도 한번에 두켤레의 신을 신을 수는 없겠지요.”
그는 분명히 나누고 베푸는 삶에 참된 행복이 있음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많이 있어야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누고 베푸는 삶은 그 마음에 사랑이 있다면 없는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콩 한쪽이라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라면 하나라도 끓여서 함께 먹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있어도 남에게 나누고 베풀 수 없고, 사랑이 있으면 아무리 적은 물질이라도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사는 자는 윤택한 삶을 살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축복하심으로 풍족하게 됩니다. 잠언 11장 24,25절은 이를 잘 말해 줍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19절은 우리가 행함과 진실함으로 형제를 사랑할 때 진리에 속한 줄을 알게 되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할 수 있습니다. ‘굳세게’ 한다는 말은 ‘평안함을 누리다’, ‘안심하다’, ‘안식하다’는 뜻입니다. 20절은 19절을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진실되게 형제를 사랑하기에 힘쓴다 할지라도 도와 줄 사람이 너무 많아 잘 도와 주지 못해 때로는 양심에 가책을 느낍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로 인해 우리는 안위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21-24절은 우리가 형제를 진실되게 사랑하게 될 때 누릴 수 있는 축복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응답받을 수 있다는 것은 실로 큰 특권입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을 살게 됩니다(24).
참된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참된 사랑은 형제를 살리고, 자신도 참된 행복을 누리며, 더 나아가 공동체를 살립니다. 우리가 행함과 진실함으로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사랑의 공동체를 통해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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